대학 졸업 후 고향에서 교사로 일하다

임종명은 부자 집과 신앙인의 가정에서 출생하여 전문 학생이 된 것이 자기만의 행운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어서 그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3.1독립운동 이후1920년대 조선의 대학생들은 최고의 지성인을 뽐낼 수 있지만, 시대적 아픔을 안고 있었다. 당시 대학생은 크게 3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방종파로, 일본의 식민지 백성인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비관하여 술과 기생집을 전전하며 방종한 생활로 빠져든 학생들이다. 두 번째는 현실파로, 망국의 슬픔 속에서도 현실을 직시하여 일본을 조국으로 알고 출세를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이다. 세 번째는 계몽파로,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무지(無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신념으로 방학 때마다 시골에 가서 야학을 열고 청소년이나 부녀자들을 가르치는 애족학생들이다.

임종명은 대학생활 중 한때 방황을 한 적도 있지만 곧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믿음으로 이를 극복했다. 그리하여 그는 신앙이 좋은 동기생 안익태와 함께 미래를 모색하며 함께 기도했다. 그리고 계몽파에 합류하여 산골마을에 가서 야학을 열었다. 그는 국어를 가르치고 안익태는 그때 은은히 번지고 있는 애국가를 스코틀랜드 민요풍으로 가르쳤다. 그러다 나중에 애국가 가사에 친히 작곡을 해서 오늘 우리나라의 애국가를 만들었고 세계적인 지휘자가 되었다.

임종명은 1924년(21세)에 부친의 성화로 믿음의 규수 신옥순 양과 결혼을 했고, 이듬해에 첫 아들 익성(益聖)이를 낳아 부모를 기쁘게 해 드렸다. 1926년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확고한 사명감을 가졌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비결은 ‘온 백성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동시에 백성들이 무지에서 해방을 받는 것이다’하고 깨달은 것이다. 즉 신앙과 교육만이 일본에 빼앗긴 국가를 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고향에 가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틈틈이 신앙과 애족사상을 강조했다. 또 고향 교회 집사로 시무하면서 교회의 부흥에도 힘을 썼다. 마침내 1936년 그는 나이 33세에 고향교회에서 최초의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그 후 교회에서는 모범적인 장로로, 학교에서는 모범적인 교사로 최선을 다했다.

1937년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일으키면서 한반도에는 억압과 착취가 더욱 심해졌다. 기독교회에 대해 신사참배를 요구했으며, 학교에서는 국어와 국사과목을 모조리 없앤 후 일본어와 일본역사로 대치했다. 그리고 학교 안에서 우리 말 사용을 금지하고 적발할 때는 엄한 벌을 가했음으로 분통이 터져 사직을 몇 번이나 결심했다가 겨우 참고, 교회에 가서는 눈물로 하나님께 일본패망을 호소했다.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1945년 광복이 찾아왔다. 일본 관리들이 물러가자 면민들은 그를 면장으로 추대했다. 그는 면장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여 면장을 사임하였고 상당한 토지를 팔아서 면 소재지에 사립학교인 장년중학교를 설립했다. 교육이야 말로 국가의 백년대계가 아니겠는가. 그는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학비를 면제해주고 교장 겸 교사로 학생들에게 신앙과 학문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러나 1년 후 북한지역을 집권한 공산주의 세력이 ‘농지개혁’을 실시하면서 그는 많은 토지가 강제로 빼앗겼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농민들을 착취한 지주(地主)라는 혐의로 내무서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즉결처분을 대기하게 된다. 다행히 그의 제자 하나가 공산당 간부로 나타나 그의 선행을 증언하여 2달 만에 극적으로 석방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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