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 강연과 십자군전도대 사역

피난생활고에 지친 어느 날, 장남 대벽이 찾아와서 온 식구가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대벽은 혼자 부산으로 내려오다가 생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낙동강을 헤엄쳐 건너 부산에 도착, 가족들과 기쁨의 상봉을 한 것이다. 하지만 전황이 급박해지고 장정들을 마구잡이로 군에 입대시키면서 대벽은 재회의 기쁨이 채 가시기 전 UN군에 입대했다.

최창도 목사는 북진하는 아군을 따라서 천안으로 돌아와 보니 여러 성도들이 구속되어 있었다. 그는 천안경찰서장에게 석방을 요구했다. 서장은 “목사님, 말도 마세요. 빨갱이에게 협력해서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한 장본인들입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최 목사는 굽히지 않고 경찰서장과 간부들에게 “당신들은 총대를 들이대고 죽인다고 협박하면서 협력하라고 할 때 협력 안 할 수 있겠는가?”라고 큰 소리로 따지듯이 하여 신자들을 석방시켰다.

최 목사는 매곡교회 성도들 수 십 명이 외딴집에 수용되어 사형집행일만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즉시 치안대장을 만나 “나는 천안군 국방사상대책위원이다. 내 교회 신자는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해치기만하면 당신들도 법에 의해 처단할 테니 해치지 말라”고 말을 한 후 헌병대장을 찾아가 선처를 구해 모두 구출했다.

최 목사는 천안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시국 강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공산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공산주의는 마귀의 역사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피를 토하듯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그는 복음전파로 끝을 맺었다. 군중들은 마음을 움직여 환호성을 쳤고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시국 강연으로 인해 일부 공산주의자들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했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실의에 빠진 백성들이 복음을 듣고 변화되어 소망을 갖고 새 출발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했다.

한편 UN군에 입대한 장남 대벽이 늠름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손목시계를 어머니의 손목에 채워주면서 이 시계를 볼 때마다 아들이 당당한 대한민국 군인임을 확인하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아버지의 간곡한 기도를 받은 후 귀대했다. 하지만 부대장으로부터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비보를 받은 것이 대벽의 마지막 소식이었다. 

1953년 6월, 6·25전쟁으로 유보되었던 십자군전도대는 4개의 전도대로 개편되어 최 목사는 제2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제1대 대장은 장리초 목사. 제3대 대장은 천세광 목사, 제4대 대장은 조기함 목사였다. 십자군전도대는 1953년 5월부터 1954년 3월까지 2306회의 집회에 43만8824명이 참가했다. 그 중 2만8631명에게 축호전도를 하고 16만1550매의 전도지를 배포했으며 결신자가 3만0108명이었다.

1955년에 십자군전도대는 조직을 2개의 전도대로 개편하고 제1대 대장에 최 목사를 임명했다. 최 목사는 십자군전도대로 활동하여 원주봉산(현 원주중앙), 가송, 남대전, 당진, 내경, 별리, 세류, 대천교회 등 13개 교회를 개척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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