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월남과 해방 직후의 목회 활동

북에 남아있던 가족들은 남녘하늘을 바라보며 최 목사를 그리고 있는데 어느 날 남한에서 이정실 집사가 찾아왔다. 그로부터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은 사모는 5남매를 이끌고 트럭을 타고 이 집사를 따라 사리원에 도착했다. 검문하기에 “병 고치러 간다”고 하여 최 목사 가족은 통과되었으나 이 집사는 검문에 걸려 하차 당했다.

난감해진 최 목사 가족은 가까스로 교회를 찾아가서 한 밤중에 기도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사모님”하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밖에 나가 트럭을 탔고 해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최 목사의 가족이 배를 타고 건너편에 도착하자마자 총소리가 났고 우왕좌왕하는 중 이 집사가 나타나 이 집사의 안내로 38선을 넘어 자유의 땅 개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최 목사 가족은 월남 피난민을 위한 천막촌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렀다가 기차로 서울역에 도착했고, 서둘러 무교동교회 이영신 집사 댁으로 안내되었으나 최 목사는 전도차 출타 중이어서 만날 수 없었다. 나중에 최 목사가 돌아온 후 가족들은 기쁨의 해후를 할 수 있었다.

최 목사는 전국교회 재건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느라고 가족들을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이영신 집사가 이들을 잘 대해주었으나 이 집사의 집안이 너무나 정결하고 그의 성격이 깔끔하여 아이들이 어지럽힌 집안을 쉴 새 없이 쓸고 닦아서 사모는 미안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1947년 11월 안양교회의 장로가 손수레를 끌고 와서 다짜고짜 이삿짐을 싸라고 독촉하는 것이었다. 사모는 최 목사의 말씀이 없었다고 거절했더니 최 목사와 의논했다고 해서 이삿짐을 꾸려 눈을 맞으며 이사를 했다.

이사짐을 가지고 도착해보니 공회당을 빌려서 12명의 신자가 예배드리는 교역자 이동이 잦은 교회였다. 안양교회는 최 목사와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최 목사 가족을 이사시킨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최 목사도 어찌할 수 없이 교회에 부임했고 목회에 열과 성을 다했다.

교회는 식생활도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최 목사는 해산 후의 산모를 위해 교회와 목사의 체면 때문에 밤중에 몰래 산에 가서 땔감나무를 해왔고 자녀들은 주조장에서 버리는 술찌끼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기에 때론 얼굴이 불그스레하게 달아오르도록 취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다니는 자녀들은 노트 한권에 모든 학과를 기록했고 지우개가 없어 손가락에 침을 발라서 지워 노트가 까맣게 되었다. 미술시간에 크레용이 없어서 벌을 서고 학비를 제대로 내지 못해 방과 후에 청소를 했다.

최 목사는 이런 고난 속에서도 성직자의 사명을 흔들림 없이 고고하게 지켜나갔다. 그는 성도를 사랑하고 보살핌이 유별났다. 실직자가 매우 많은 상황에서 교회의 젊은이들을 취직시키려고 안양에 있는 공장을 거의 찾아다니며 책임자에게 취직을 부탁하는 등 성도들의 어려움을 자신의 아픔보다 더 안타까워했다. 그런 헌신으로 교회에 부임한지 1년 9개월 만에 80여명의 신자로 성장했다.

최 목사는 1949년 8월 천안교회로 전출되었다. 1950년 총회에서 십자군 전도대를 조직하고 최 목사를 대장으로 임명했으나 6·25전쟁이 일어나 활동이 유보됐다. 최 목사는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피난하여 방 한 칸을 얻어서 기거했으며, 국방부 정훈국 선전국에 종사하며 복음을 전했다. 사모의 해산으로 16살의 장녀는 8식구의 살림을 도맡았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