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과 소명

성결교회에 중포(重砲), 대포(大砲), 소포(경포, 輕砲) 별명이 붙은 세분 목사가 있었다. 중포 최창도 목사, 대포 천세광 목사, 소포 김정호 목사였다. 통틀어 삼포(三砲)로 통했다. 중포는 155~175mm 포, 대포는 105mm포, 경포는 박격포다. 최창도 목사는 피를 토해내듯 열정에 찬 설교나 연설로 청중의 심령을 움직이고 확신을 갖게 하여 중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열정적인 전도자로, 부흥사로, 목회자로, 선교사로서 성결교회를 큰 교단으로 만든다는 야심찬 의욕으로 불철주야 기도하고 동분서주 전도하여 수많은 영혼을 구원시키고 많은 교회를 세웠다. 그는 좁은 한국에서 전도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서 일본, 아르헨티나, 미국에 건너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으니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따른 충성된 종이었다.   

최 목사는 1901년 9월 20일 평남 용강군 만하리에서 부친 최진백과 모친 김진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최진백은 당시 용강군에서 크게 존경받는 분이었다. 진하마을에 있는 장로교회의 장로였으며 진지동소학교 교장이었고 평양숭실대학 제1회 졸업생으로서 학벌로 보나 풍채로 보나 용강군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부친은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창도(昌道)라고 지었다. 창도라 함은 십자가의 도를 높이 빛내라, 창성하게 하라. 최창도(崔昌道: 높을 최, 빛날 창, 길 도) 그이름 대로 최 목사는 일평생 십자가의 도를 높이 빛내며 일생토록 험한 외길을 걸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진흥동 장로교회에서 주일학교 부장의 책임을 맡고 어린이들을 신앙으로 인도했다. 그가 17세 때에 일본에 거주하는 누이의 주선으로 도일하여 유학을 했으나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과수원 별채에서 은거했다. 건강이 회복되어 1929년 10월 29일 한광진 규수와 결혼하고 과수원을 경영하며 단란하게 살았다.

그는 다시 일본 유학의 장도에 올랐으나 결핵 재발로 부득이 귀국하였고 백방으로 치료를 위해 노력했으나 재생의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는 새벽기도와 금식기도, 백일작정기도를 강행하면서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했다. 그때 이웃 성결교회에서 한성과 목사가 인도하는 대부흥회에 참석하여 중생의 은혜와 폐결핵이 완치는 되는 놀라운 신유의 은혜까지 받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최 목사의 부친은 진지동에 성결교회를 창립했고 황경찬 전도사가 부임했고, 그는 더욱 분발하여 교회 일에 충성했다.

그는 바이올린과 클라리넷을 연주하며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했다. 그러나 그는 죽음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이 한 몸을 바쳐서 보답하기로 결심하고 1938년 4월 1일 경성신학교에 입학했다. 가장인 그가 서울로 상경하여 가족들의 생활고가 극심했으나 부인의 노력으로 흉작이던 농사가 풍작이 되었다. 헌신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셨다고 온 동네가 축하했고 이로 인해 전도의 문도 열렸다.

성결교회는 초기부터 길거리에 북을 치며 복음을 전하는 직접전도로 부흥된 교단으로 1930년대부터 악대를 동원하여 트럭에 ‘전국순회전도대’라는 현수막을 걸고 도시를 누비며 전도했다. 저녁에는 초대형천막을 치고 집회를 열었는데 초대교회와 같은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다. 이 결과로 교회가 부흥되고 신설교회도 많이 생겼으나 전도자가 부족하여 성서학원학생들을 동원했는데 한 학년에 3개월 수업 9개월 전도실습등 6년 과정을 거쳐 졸업하는 제도를 운영했다. 최창도는 이러한 시기에 경성신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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