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삶인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서

1953년 새해를 맞아 임종명 장로는 이상한 감회에 젖는다. 그동안 새해를 맞으면 일반 사람들처럼 반드시 새로운 희망과 결심을 세우고 기도했었다. 그는 올해 만 50세가 되었다. 교회에서는 인정을 받는 장로요, 사회에서는 존경받는 중학교 교장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반백의 나이가 되고 보니 무엇인지 허전한 마음이 생겨났다. 지금보다 더 높고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었고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는 3월 초에 서울 아현성결교회 내에 있는 수도성서학원(야간부)에 편입했다. 그가 숭실대학 졸업자이기 때문에 규정에 따라 3년 과정 중 3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학원의 학생들은 임 장로처럼 늦게 헌신한 나이 지긋한 집사나 장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낮에는 학교에서 일을 본 후, 저녁에 기차로 서울에 와서, 또 버스를 타고서 학교에 다녔다. 50세의 고령이었지만, 성경의 영적강해에 매료되어 피곤한 줄 모르고 열심히 공부했다. 졸업 종강을 한 달 앞두고 고혈압에 시달려 병원에 입원, 치료하는 고달픔도 겪었지만 그는 명예로운 졸업을 했고, 학교를 사직했다.

그의 평소 인품과 신앙을 높게 산 교수들의 소개로 첫 목회지인 부여중앙교회 담임전도사로 부임할 수 있었다. 부여중앙교회는 개척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은 교회였지만, 유서 깊은 백제의 고도(古都) 부여가 마음에 들어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는 전도사 신분이었으나 오랫동안 장로로, 또 교장의 경력이 있어 신자들은 그를 ‘장로님’ 또는 ‘교장전도사님’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는 목회한지 1년 후인 1954년 4월 교단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는 초고속 행진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목사안수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3년간 전도사 시무경력과 함께 목사고시에 합격해야만 한다. 그러나 장로시무 5년 이상의 경력자가 신학교를 졸업할 경우, 1년 만에 목사고시 합격으로 목사안수를 주는 경우에 그가 해당되었던 것이다.

목사안수를 받는 날, 그는 처음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오직 목회일념으로 하나님께 충성할 것을 굳게 다짐하고 기도했다. 그가 목사가 되자, 신자들은 ‘장로목사님’ 또는 ‘교장목사님’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이런 그의 소문이 신자들에 의해 조금씩 번져 좁은 부여사회에 널리 번져갔다.

1950년대 당시 대학출신이 귀한 때였고, 초교파적으로 대학출신 목회자를 찾기 힘든 시절인데, 그가 평양 숭실대 출신이고 장로로 오랫동안 사역했으며, 더구나 중학교 교장 출신이라는 화려한 간판으로 부여지방에서 그의 존재감이 존경으로 변해갔다. 이런 외적인 요인은 때로 이웃 교회의 신자나 미신자들이 찾아와 신앙생활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이 초대교회 사도들처럼 오직 기도와 말씀을 전하는 것에 더욱 매진했다. 그는 겨우 신학 1년간의 배움뿐인 약점을 스스로 알기에 틈만 나면 독서하고 성경연구에 매달렸다. 그리고 설교준비에 전력을 다했다. 당시 목사들의 설교는 주로 몇 개의 본문 대지와 소지를 적은 메모를 놓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사가 가르칠 교안을 작성하듯 원고설교를 했다. 그래서 한마디 허튼소리가 없고, 설교의 한마디 한마디가 금언이고 잠언이며 영감어린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기독교연합회 임원들은 그를 일찍 회장으로 추대했고, 또 중요 연합 집회의 설교를 도맡아 했다. 인격과 신앙이 조화된 명설교의 본보기였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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