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소장학금과 불법과외 고발

오양호 교수의 글을 이어서 소개한다. “해마다 신학기가 되면 그는 1년 동안 과외수업으로 모은 돈을 뭉치로 싸들고 대구의 우시장으로 간다. 그는 그 돈으로 큰 암소 10마리를 산 후, 소를 판 사람들에게 암소 고삐를 각자 쥐고 줄을 지어 당시 그가 다니던 교회로 가게 한다. 그가 장로로 시무하는 교회에는 이미 그가 선발한 10명의 장학생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먼저 그들에게 ‘밖에 있는 암소 한 마리씩을 장학금으로 줄 터이니, 잘 길러서 새끼를 낳으면 새끼를 팔아서 계속 등록금으로 사용하라’고 간곡히 부탁의 말을 한다. 그리고 모두 교회 마당으로 나와 암소 고삐를 한사람씩 들려준다. 장학생들은 고맙다고 인사한 후, 암소 고삐를 쥐고 자기 집을 향해 간다. 이것이 소위 ‘암소 장학금’이다. 당시 대구의 시민들은 이 암소장학금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래서 가난한 학생들은 암소장학금을 타기 위해 교회를 찾아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나중에 목사나 장로가 되기도 하고, 예수 잘 믿는 교수나 공무원, 그리고 사장들이 되었다.”

김성혁 장로가 과외강습비를 제일 먼저 대학생 장학금으로 사용한 것은 이유가 있다. 그가 중학생 때부터 선교사의 장학금으로 공부했고, 일본유학도 장학금으로 해 평생 편하게 살 수 있었으니,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채(負債)의식’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이 복음 전도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그 많은 영혼들을 구원했듯이 김성혁 장로의 장학에 대한 부채의식은 수많은 학생들을 위한 교육에 대한 기여로 그들을 사회에 공헌케 했다. 이렇게 암소장학금을 받은 학생은 10년 동안 120명이나 되었다. 특히 7곳의 농촌교회(하북, 중율, 태촌, 상주동부, 산상, 신안, 대성) 건축을 전적으로 도와 영남지역 성결교회 성장에 일조했다.

그가 소천하기 전까지 베푼 장학금과 가난한 자들에게 지원한 금액은 30년 동안 당시 약 25억 원 이상 될 것이라고 생전에 그가 다닌 교회의 여전도사로, 이웃 사랑을 위한 정보 제공과 심부름을 한 권영숙 전도사는 밝히고 있다. 김성혁이 1986년에 소천 했으니, 당시 이만한 금액이면 대형 빌딩도 살 수 있는 큰 부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늘 낡은 군화 한 켤레와 낡은 양복 한 벌로 만족했으며, 식사는 보리밥에 된장국과 빈대떡 하나였다고 하니, 그는 분명 시대의 기인(奇人)이나 이웃 사랑의 전도사가 아닐까?

언젠가 그의 집 근처의 영수학원에서 그가 불법과외를 한다며 경찰서에 고발했다. 고발장을 접수한 남대구경찰서의 형사가 김 장로의 집에 와서 사실을 확인한 후, 수입지출 기록을 입수해서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수입은 흔한 노트가 아닌 영문 다이제스트 잡지 뒷장에 볼펜도 아닌 연필로 쓴 기록인 점도 그렇지만, 지출내역을 꼼꼼히 적은 허름한 노트에 사람들의 이름과 금액, 그리고 장학금이나 구제를 한 사람들뿐이었기 때문이다. 형사가 몇 사람을 찾아가 확인한 결과 모두 사실일 뿐 아니라. 모두들 김 교수에게 감사하다며 치하를 했다.

조사를 하다 오히려 감동을 받은 경찰은 본서에 가서 서장에게 보고하기를 “김성혁 교수의 사설과외는 무인가 과외는 틀림없지만, 단속보다는 오히려 국가가 장려하고 표창해야 할 선한 사업”이라고 보고했다. 그래서 당시 정부의 새마을 사업 성공사례로 대통령 표창상 시상을 위해 동직원이 이력서와 사례를 자세히 알아보러 그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핀잔을 듣고 쫓겨났다. 왜냐하면 상 받는 것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에 위배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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