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동교회의 터를 계약하다

장두원 목사는 청주에서 2년 동안 시무하다가 1948년 4월 김응조 목사의 권유로 돈암동교회로 부임했다. 장 목사는 김응조 목사가 대전감리목사로 있을 때 그에게 집사로 임명되고 그의 권유로 복음사역자의 길에 들어선 바 있다.

그의 목회관은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그의 부흥관은 조금 달랐다. 대한민국의 건국초기여서였는지, 젊은이들을 많이 불러 모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청년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많은 유능한 청년들을 교계에 진출시킴은 말할 것도 없고 교육계, 예술계, 문화계, 실업계, 정치계, 관계에 배출시켰다.

이렇게 영혼 구원에 열심이었던 장 목사는 1950년에 돈암동교회를 시무하면서 부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목사가 세속적인 명예를 좇는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남기게 되었다. 그 후 차점으로 낙선했으나 정계인사들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선무역주식회사’의 명의로 당시 7, 80만원의 융자를 받아 현재의 돈암동교회의 터를 계약했다.

최종원이라는 사람의 소유였던 돌산 1300평을 계약한 장 목사는 그곳에 교회와 신학교를 세우고자 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터진 6·25는 장두원 목사와 성도들의 소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장 목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비참했던 부산피난생활에서 세상의 부를 맛보았다. 그는 전쟁 중에 ‘남선무역주식회사’를 경영하며 일본에서 비료를 수입하는 무역을 했다. 그러나 주의 종은 하늘에 보화를 쌓아야 하는 사람이라서 일까? 그 후 그 많던 재산을 다 잃고 회한의 가슴을 안고 다시금 돈암동교회를 찾아왔다. 하지만 돈암동교회에서는 한명우 목사가 부임하여 성도들을 보살피고 있었다.(돈암동교회50년사 p.98-102)

장 목사는 1984년에 서울의 신림교회에서 약 5년 동안 시무했다. 그리고 목회일선에서 은퇴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가지 서울의 봉일교회 명예목사로 교회를 섬겼다.

1989년 6개월 동안 일본의 나가노 현 우에다 시의 일본인교회에서 일본 본토 말로 일본정부가 허락한 기간대로 목회를 했다. 그 곳에서 성결교회 교인이었던 최자실 목사를 만나 같이 집회를 인도하고 그의 특청으로 청평 금식기도원 원목으로 1년 동안 시무했다. 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하면서 영적 회복운동과 신유의 은사로 병자들을 치유하기도 했다.

그는 말년에 활천에 기고한 ‘목회자와 신유의 은사’라는 글에서 성결교단의 젊은 목회자 중에서 성령의 큰 불을 받고 일어날 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했다.

“나는 예배 후에 신유의 집회를 가질 것을 제의한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찬송 한 장을 부르고 안수기도 한 차례 해주어라. 차차 뜨거워지면서 전력투구하게 되고 기적도 일어날 것이다. 성령의 불이 일어나면 전도 구령운동이 일어나고 부흥의 새바람이 일어날 줄 확신한다. 신유의 큰 은사를 받아서 진면목을 창출하는 부흥의 중흥을 기원한다.” (활천 451호 1991.3. P. 57~58)

그는 향년 92세에 “내가 10일 안에 곧 하나님 앞에 가겠노라”고 자손들과 친지들에게 예언한 대로 1999년 3월 13일 아침에 간호사들에게까지 “수고하였다”고 감사의 말을 남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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