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꿀 판매와 아들의 결혼식
김성혁 장로는 평소 근검과 절약, 그리고 봉사의 삶을 무엇보다도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최고로 여겼다. 그는 사회의 기반은 신뢰성으로 보고 ‘국민들이 정직하지 않으면 사회의 기틀이 무너진다’며 학생들에게 정직성을 자주 강조했다. 그는 음식물 중에서 꿀과 참기름에 가짜가 너무 많아서 국민들의 정직성에 대해 개탄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하루는 그에게 안동에 사는 잘 아는 김 모 장로가 찾아왔다, 김 장로는 서울신대 출신이지만 목회를 접고 장로로 안수 받아 교회 봉사에 앞장을 서는 분이다. 김 장로는 “장로님. 제가 양봉사업에 실패했습니다. 자금을 대주시면 재기하겠습니다”하고 부탁했다.
김성혁 장로가 “장로님. 절대로 가짜 꿀을 팔지 않겠다고 저와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약속하지요. 저는 정직해서 거짓말을 못해 항상 돈을 많이 못 법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제가 사업자금을 대고, 장로님이 생산하는 꿀을 제가 팔아보겠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안동 김 장로의 양봉사업은 김 장로의 열심으로 인해 꿀을 많이 채취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해마다 가을이면 김 장로는 김 교수의 대학 연구실에 수십 통의 꿀을 배달했다. 그러면 김 교수는 자기연구실 문에 이런 글을 적어 붙인다. ‘진짜 꿀 있음-김성혁 백’. 그리고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에게 광고한다면서 “건강에 좋고 감기에 효능이 있는 꿀이 있소. 내가 잘 아는 모 장로님이 생산하는 진짜 꿀이니 필요한 학생은 내 연구실에 와서 사 가시오”라고 말했다.
평소 김 교수의 정직성을 잘 아는 학생들은 김성혁 장로에게 와서 진짜 꿀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그래서 수십 통의 꿀이 금방 팔렸다. 이렇게 해마다 꿀을 판매하자, 김 장로의 꿀 사업도 잘되고 김 교수의 자금도 금방 회수되어 다른 사람들을 또 돕게 했다.
이런 김 교수의 철저한 성격이 그의 가족에 대한 태도는 어땠을까? 물론 아내나 6남매 자녀들도 근검절약이 일상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 단면을 오영호 교수의 글로 다시 엿본다.
“1960년대 말 김성혁 교수의 외동아들이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이북에 두고 온 장남을 늘 후회하면서도 차남을 잘 길러 어느새 경북의대를 졸업하고 가정을 갖게 되었다. 그는 결혼식을 앞두고 아들을 불러 말했다. ‘내가 좋은 며느리를 얻게 되어 기쁘다. 그런데 결혼식은 집에서 간단히 치를 테니 그리 알거라’ ‘예’ 마침내 결혼식이 김 장로의 집에서 양쪽의 가족 20여명이 모여 조촐하게 치러졌다. 주례는 김성혁 장로였다.
냉수 한 그릇을 떠 놓고, 촛불 한 쌍을 켠 후, 신랑이 신부에게 금 한 돈의 반지 하나를 예물로 전했다. 주례사가 시작되었다. ‘너는 의사로서 이제 어디 가든지 사는 걱정은 없을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만은 황금처럼 변치 말고, 모든 사람들과 둥근 반지처럼 화목하게 살아가기 바란다. 집을 사고 살림살이 하는 것도 의사라면 걱정 할 일이 아니기에 한 달 사글세 방 얻을 돈만 준다.’ 그리고 결혼식을 마친 후, 가족 기념사진을 찍고, 그 자리에 둘러 앉아 국수 한 그릇씩 먹는 게 전부였다.”
김성혁 장로는 그의 글 ‘성도의 가정과 사명’(활천 1963. 4호)에서 “어떤 성도는 11조를 실시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감격해서 10의 2조를 결심했다. 그래서 10의 1은 교회에 바치고, 또 10의 1은 불쌍한 학생들에게 학비를 돕는데 쓰기로 했다. 선한 일을 하다보면 힘이 생기고 신앙생활의 참 기쁨을 더욱 깨닫게 하여 다음에는 10의 3조를 하게 되고, 지금은 자기 수입의 반 이상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쓴다. 그는 ‘육신을 위해 최저생활 감수하고 나머지는 하늘나라 사업에 바칠 것이며’, 이것이 그의 생활신조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