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과 월남, 그리고 교사, 교수로 대구에 정착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광복의 날이 왔다. 그가 이 날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던가. 그는 해방 직후 혼란의 와중에서도 민족의 앞날은 오직 교육에 있다는 확신으로 들뜬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평양왕성중학교 영어교사로 들어가 열심히 가르쳤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38선이 그어져 남북으로 나눠졌고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가 있었던 북쪽 땅에서 소련군과 함께 나타난 김일성이 소련의 힘을 업고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 나갔고, 주일에도 국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부역시켜 신자들이 주일예배를 못 드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는 신앙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선교사들의 나라인 미국이 다스리는 남한으로 넘어갈 것을 결심했다. 하지만 늙으신 모친이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고 우기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아들을 모친 곁에 남겨 놓고 눈물로 떠나야 했다. 그는 곧 통일되면 부모님께 돌아 올 것을 약속하고 아내와 함께 죽음의 고비를 몇 번 넘기는 고생을 하면서 38선을 넘어 남한에 왔다. 그때가 1947년 여름이었다.

서울에 왔지만, 반기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이었다. 그는 허름한 방 한 칸에 세를 들어 살면서 주일에는 북한의 신자들이 모인다는 영락교회나 평안교회 등에 가서 예배를 드렸고, 그가 일본 유학생임을 안 어느 장로가 추천해서 중동중학교 영어교사로 들어갔다. 그러다 1948년 가을에 대구의과대학이 신설되면서 그를 교수로 초빙, 대구로 내려가서 1952년 봄 학기까지 영어교수를 했다. 그 덕에 그는 6.25전쟁의 직접적인 고난을 겪지 않았다.

그는 1952년 여름 고병간 박사가 국립 경북대학교 학장이 되면서 대구에서 영어를 잘 가르치기로 소문난 그를 영어교수로 초빙했다. 그는 고 박사의 부름을 기쁘게 응답하여 그가 소천할 때까지 성심을 다한 경북대학교 교수와 뛰어난 영어학원의 강사로 이름을 널리 날리게 되었다.

그는 1956년부터 뜻이 있어 낮에는 대학 교수요, 밤에는 자택 2층 다다미방에 사설학원을 차리고 시사영어를 강습했다. 그가 과외학원을 차린 것은 돈이 아니라 평소 그가 꿈꾸던 꿈을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꿈은 전에 자신이 귀한 장학금 혜택을 받아 공부했던 것처럼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공부하게 하는 것이었다. 교수직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과외학원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그의 과외학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양호 교수의 글을 인용한다.

“나는 이분 밑에서 근 6년 이상 공부를 했다. 당신의 집에 영어강습소를 차려 놓고 대학생들에게 과외를 하셨다. ‘타임’지와 ‘다이제스트’를 하루 3시간씩 강의했는데, 나는 학부, 대학원, 석, 박사 과정시절에 그 강습소에서 영어공부를 했다. 그때 수강료가 500원이었다.

이 수강료를 선생님이 직접 받았는데, 검은 천 신주머니 같은 전대를 앞에 놓고, 영어잡지 ‘다이제스트’ 뒷장에 어느 학교 누구, 몇 월 며칠까지라고 몽당연필로 또박또박 쓴 후, 받은 돈을 전대에 넣는다. 그 흔한 노트에 기록하지도 않고, 금고도 없다. 그때 500원이면 요즘 5만 원 이상이어서 월수입이 기백만 원은 족히 될 것이다. 해마다 여름이나 겨울방학도 없이 사시장철 그의 다다미방에는 학생들로 언제나 초만원이었으니 대학 교수치고 짭짤한 부수입이 아닌가? 그런데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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