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의 선교활동과 이민목회

1955년 12월 최창도 목사는 인천평동교회로 부임했다. 그의 열정적인 설교와 집중적인 전도 활동, 그리고 성도에 대한 유별난 사랑의 보살핌으로 온 성도가 은혜 충만한 가운데 전도와 봉사의 불이 붙어 교회가 활기차게 부흥 성장했다. 교회당이 비좁아 밖으로 확성기를 설치해야 할 정도였다.

주일학생들이 교회마당에 모이면 일반초등학교 같아 보였고 구역회가 활성화되어 7~80명이나 되는 구역도 있었다. 1957년 4월 14일에는 최 목사의 위임식을 거행하는 등 교회가 부흥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1960년 봄에 몇몇 집사들이 평동교회를 떠나 화수동교회를 세워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했다.

1961년 3월에 최창도 목사는 일본에 있는 누이 최상신 전도사의 아들 최광욱(조카)의 주선으로 재일대한기독교의 초청을 받아 한일국교가 체결되지 않은 시기에 일본 전국을 누비며 부흥회를 인도했다. 죄를 회개하고 통회 자복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일본교계에 화제가 됐다. 1965년 일본동맹기독교단의 초청으로 다시 도일하여 한인친선집회를 인도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인정하여 교단은 1967년 제22회 총회에서 전도공로상을 수상했다.

그는 해외선교를 꿈꾸며 총회로부터 남미 선교사 임명을 받았다. 하지만 최 목사가 목적했던 브라질 이민이 여의치 않아 1970년 아르헨티나로 입국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109번 버스종점이 있는 109촌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고생도 많았지만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기쁘게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고 기쁨으로 견뎠다.

1971년 교단총무 한명우 목사가 나성성결교회 안수훈 목사에게 아르헨티나에서 고생하는 최 목사를 미국으로 초청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안 목사의 초청으로 미국에 입국하여 나성성결교회에서 2년 동안 안 목사와 동역했다. 최 목사의 가족은 1972년 2월 최상신 전도사의 가정에서 8명이 모여 시온교회를 창립하고 이민목회를 시작했다. 그 뒤에 사위 오영석 목사의 가족과 맏며느리가 이민을 와서 교회의 규모가 갖추어갔다.

아르메니안 교회를 임대하여 예배처소를 옮긴 후 신도가 100여 명으로 부흥되었다. 그는 가족교회의 형태를 벗어나기 위해 부산서면교회의 김수호 목사를 청빙하고 은퇴하여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는 은퇴 후에도 복지비의 반액을 교회건축비로 헌납하는 등 교회봉사에 앞장서서 충성하다가 1989년 4월 2일 소천했다.

나성교회의 원로목사인 안수훈 목사는 최 목사의 목회철학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첫째로 은혜를 보답하는 정신과 신앙으로 헌신하고 목회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몸이 신유의 은사로 건강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큰 자랑이며 영광으로 생각했다.

둘째로, 교단부흥을 위해 항상 노력하고 기도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고 한 교회라도 더 세워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한국성결교회를 큰 교단으로 만든다는 야심 때문에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 일생을 통해서 13교회나 세웠고 미국에서도 한 교회를 세웠다.

셋째로, 세계 선교를 꿈꾸었다. 좁은 한국에서 전도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 항상 세계 선교를 꿈꾸고 있다가 일본에서 복음을 전파했고 멀리 아르헨티나와 미국까지 건너가 교회를 세웠다. 그는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른 충성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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