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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영은 출옥 후 다시 전도자의 길을 택했다. 1922년부터 1927년까지 충남 강경교회 전도사로 파송받아 그 교회에서 6년간 사역했다. 그 당시 일본제국은 신사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요하는 시기였다. 1924년 백신영 전도사가 부임한 강경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최초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24년 10월 11일 일본이 제일(祭日)을 맞아 강경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신사참배에 동원했다. 다른 학생들은 신사에 참배했으나 강경보통학교 교사 김복희 와 그가 인솔하는 57명의 학생들은 불참했다. 김복희는 강경교회 주일학교 교사였고 학생들도 대부분 강경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들은 헛된 신에게 절하는 것이 무지한 미신이며 또한 하나님 앞에 죄됨을 깨닫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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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14.04.02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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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애국부인회’가 이처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으나 불행히도 동료교사 오현주의 배반으로 이 조직은 경북경찰국 고등계 형사 유근수란 자에 의해 탄로 났다. 1919년 11월 28일 전국 각지에서 한날 한시에 애국부인회 간부 및 회원은 물론이고 기부행위를 한 부녀자와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취급당하던 여성들까지 속속 체포되었다. 결사부장 백신영을 비롯한 42명의 애국동지들은 검사국으로 이첩되어 대구형무소 미결감옥으로 옮겨졌다. 백신영과 김마리아는 어둡고 갑갑하고 음습한 감방에서 여러 달을 지낸 까닭에 중병이 들었다. 이에 재판부는 여론의 악화를 두려워하여 1920년 5월 20일에 병보석을 허락했다. 1920년 6월 7일 대구지방법원 제1호 소법정에서 첫 공판이 열렸다. 검거된 애국동지들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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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14.03.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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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영은 1889년 밀양의 백씨 가문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부모의 슬하에서 애지중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백신영이 열여섯 꽃다운 시절에 그의 부모는 좋은 신랑감을 찾아 백년가약을 맺어주었다. 그러나 이 어찌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20세 미만에 남편을 사별하고 보니 앞이 캄캄해졌다. 그녀는 눈물과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절망 속에 동네 교회에 나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소망 가운데 열심히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1910년 조선왕조가 몰락한 후 교회에서 전국농촌계몽운동에 나선 김규식 박사의 부인 김순애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김순애 선생의 강연을 듣고 아는 것이 힘이요 배워야 한다는 도전을 받고 김순애 선생의 모교인 서울의 정신여학교에 입학했다. 그녀는 미션스쿨에서 신앙의 진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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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14.03.0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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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환 장로는 평생 교회에 충성하며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많이 끼쳤고, 선한 영향력도 많이 끼쳤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큰 유산은 크게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다. 하나는 그가 필사한 성경전서 7권, 또 하나는 그의 자녀 8명과 손주 17명이다.그는 평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음을 늘 아쉬워하다가 남은 생애를 주의 말씀을 필사하면서 마지막으로 주시는 은혜를 받기로 작정했다. 그는 평소 사용하던 벼루와 먹, 붓도 있었고, 또 문방구에서 파는 먹물도 있었지만 다 버린 후, 새로 장만하기로 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필사하기 위해서 새로운 먹과 붓 그리고 고급 화선지를 새로 샀다. 성경의 필사도 옛날 서기관들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필사하기 전, 샤워부터 하고 기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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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4.02.19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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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이성봉 목사가 북교동교회를 사임한 후, 김동완 목사가 제10대 목사로 부임했다. 이듬해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겨우 3년 만에 정전이 되었지만, 국토의 절반이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 국민들은 우선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그러나 피폐해진 심령들이 하늘의 은혜를 사모하여 북교동교회는 나날이 부흥되어 교회당이 좁았다.그래서 교회는 1955년 2층 석조교회당을 구상하고 기공식을 했으나 도중에 건축업자가 도망가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되었고, 김 목사도 인천으로 전임했다. 교회는 수소문 끝에 건축경험이 많은 홍순균 목사를 함열교회에서 모셔왔다. 그때가 1957년 5월이었는데, 홍 목사의 주도로 마침내 교회당은 1965년 기공한 지 10년 만에 2층 석조교회당 헌당식을 할 수 있었다.그는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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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4.01.22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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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중생을 체험한 후부터 구원의 확신이 생겨 신앙생활이 전보다 적극적으로 변했다. 그는 가끔 그에게 중생의 체험을 준 이성봉 목사를 그리워 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1948년 5월, 뜻밖에 이성봉 목사가 북교동교회 제9대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이성봉 목사는 광복 후, 성결교회의 재건을 위해 전국교회의 부흥사로 임명된 몸이었다. 그런데 북교동교회 천세광 목사가 1947년 말에 천안교회로 전임하여 목회자 공석 중이던 차에 이성봉 목사를 존경하던 북교동교회 직원들이 이 목사에게 후임목사의 추천을 부탁했다. 그리고 후임목사가 올 때까지 주일 강단설교를 지켜 달라고 계속 간청했다. 이성봉 목사는 큰사위 정승일 전도사의 목회훈련 임지로 생각하고정승일 전도사와 함께 부임하는 것을 조건으로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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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4.01.15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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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환(金日煥)은 울산 김씨 양순의 장남으로 1922년 3월 26일 한반도의 땅끝 마을 전남 해남군 산이면 초성리에서 모태신자로 출생했다. 1902년 미국 남장로교의 오웬 선교사가 세운 초성교회에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신앙생활을 한 덕분에 그는 갓난아이 때부터 주일마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 온 가족과 함께 교회에 다녔다.그는 5세부터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한문을 배우고 붓글씨로 한문을 쓰기 시작하여 평생을 붓글씨와 글쓰기를 유일한 취미로 즐겼다. 그는 8세에 20km가 되는 읍내 초등학교를 동네 큰 아이들을 따라 뛰어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일제강점기여서 학교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쳤고, 말도 일본어로 해야지 조선말을 하다 걸리면 벌을 받아야 했다. 그도 한 번 걸렸지만, 그렇게 걸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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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4.01.08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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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한기 장로는 몸은 야윈 편이지만 부인 조애순 권사의 세심한 내조로 건강을 잘 유지하며 교회와 사업, 지역사회와 총회, 총회기관 등 각 분야에서 소임을 원만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우철 목사가 갑자기 이리삼광교회로 부임한다는 발표를 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되던 중에 성도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교회가 다소 동요했지만 도 장로가 신앙으로 잘 극복하고 수습해 교회는 안정을 찾았다. 이우철 목사의 후임으로 임기택 목사가 부임했다. 임 목사는 학자풍으로 정적이고 차분한 목회로 교회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임 목사가 제천중앙성결교회로 부임하고 지성천 목사가 장항동부교회에서 1984년 11월 13일에 부임하였다. 이때 안동교회의 문예부흥이 시작되었다. 도 장로는 지 목사의 목회사역을 충실히 지원해줬다. 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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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13.12.31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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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한기 장로는 교회와 회사, 가족을 위해서 변함없이 기도에 힘썼으며 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체험하였다. 한때 도 장로에게 큰 시련이 닥쳐왔을 때가 있었다.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에 부딪힐 때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고 피할 길을 열어주셨음을 그의 자녀들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을 무척 사랑했기에 기도 끝에는 언제나 “우리 모두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또한 교회를 향한 사랑이 남달랐다. 그는 매주 토요일 강단에 꽃을 꽂아놓았다. 은퇴 후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도 교회주일 강단 꽃 장식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 모를 한 송이 꽃을 남몰래 꽂아놓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꽃 장식을 할 수 없을 때에도 주님에 대한 사랑을 남몰래 표현한 것이었다. 그가 꽃을 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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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3.12.18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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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한기 장로가 주님을 영접하게 된 발단은 그의 부인 조애순 권사와의 결혼과 연관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 도한기와 규수 조애순의 만남은 주님을 영접하게 된 그의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가져오게 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할 수 있다. 청년 도한기는 조애순을 본 순간 한눈에 반했다. 조애순은 목재상을 하는 아버지가 이북에서 피란 와서 사업에 성공한 안동의 부자였다. 조애순은 복스러운 모습으로 잘생긴 처녀였다. 한눈에 반한 도한기는 자나깨나 조애순을 잊지 못하고 만나는 순간이 자꾸 반복되기를 갈망했다. 도한기가 조애순에게 청혼을 했으나 조애순의 가정은 독실한 크리스천 가정이었다. 그래서 조애순과 결혼하려면 도한기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제시되었다. 청년 도한기는 조애순이 출석하는 안동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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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3.12.1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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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한기 장로는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기였던 1926년 9월 25일에 태어났다. 1943년 대동아전쟁의 막바지에 만주 신경(新京) 제2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만주 민중흥업은행 본점의 행원으로 입사했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업무에 성실하고 일을 잘 처리하여 모범행원으로 인정을 받았다. 1945년 8·15광복을 맞아 1943년부터 근무하던 민중흥업은행을 그해 9월까지 근무하고 조국으로 귀국했다. 1948년 홍익대학 전문부를 이수하고,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1950년 7월, 6·25전쟁의 발발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중퇴했다. 1952년 6·25전쟁이 치열하던 그때 도한기 장로는 그의 형 도한복 씨가 경상북도 안동에 설립하여 운영하던 한국벨트공업주식회사 공장의 지배인으로 발탁되어 회사 발전에 이바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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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13.12.04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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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영 목사는 1970년 교수직 정년은퇴로 정부의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그는 1973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LA에 거주하면서 후배 임동선 목사가 세운 동양선교교회 협동목사로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다. 그가 임동선 목사와는 서울에서부터 각별한 사이였다.그가 1970년 6월 LA로 여행을 가서 만난 임동선 목사는 유학 중이었다. 곧 석사학위 과정을 마치면 귀국하겠다는 임 목사를 그가 말리며 “LA에 이민자들의 영혼을 돌보는 한국인 교회를 세우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의 간절한 부탁에 따라 임동선 목사가 기도했고, 마침내 그해 7월 26일에 임 목사 사택에서 창립예배를 드렸다. 그때 그가 축사를 했다. 그는 한 달 동안 임 목사와 함께 한인들을 찾아 심방하고 권면하여 초창기 교회 부흥에 협력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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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3.11.20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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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국성결교회사’ 출간하여 교단 역사 정립하다1907년 ‘복음전도관’으로 시작된 성결교회는 1970년이 될 때까지 60년이 넘도록 교단의 역사책이 발간되지 못했다. 오직 1929년에 이명직 목사가 발간한 ‘조선야소교 성결교회 약사’뿐이었다. 창립부터 1929년까지 22년간의 기록이어서 초창기 역사연구에는 필수적인 자료였지만 그 후, 교회가 해산되고 교회가 재건되어 성장한 모습을 기록한 것이 아니었다. 이천영 목사는 그 자신이 서울신대의 역사학 교수였으나 서양교회사와 한국교회사만 가르칠 뿐 정작 우리 교단의 역사는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2년간의 노력 끝에 그는 대학에서 배운 역사적 서술을 따라 집필한 ‘성결교회사’를 총회출판사 명의로 출간했다. 이는 광복 후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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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준 기자
2013.11.13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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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후, 한국사회는 구미에서 학위 받아 귀국한 학자들로 지적 수준이 점점 높아갔다. 특히 교계는 자유주의 신학자들로 인하여 장로교가 보수와 진보 교단으로 나눠지고, 감리교신학교는 세계신학의 유행을 따라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쳤다. 그래서 교계는 감리교신학교가 냉천동이어서 냉천신학교라 불렀고, 서울신학교를 가리켜서는 신학 없는 성경학교라고 비꼬기도 했다. 이천영 교수는 1952년부터 1970년 정년까지 18년간 서울신대 교수를 지냈다. 당시 신학교수들은 틈틈이 활천에 신앙적 논설이나 설교, 강해 등을 게재하여 성결교회 신자들을 성경적으로 은혜롭게 양육했다. 그러나 교계의 이런 냉소적 비난에 마침내 그가 붓을 들었다. 처음에 그는 ‘우리의 깃발’이란 주제로 4회(1953년)에 걸쳐 전통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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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3.11.0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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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아시아 석권을 목적으로 소위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처음에는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갈수록 군수물자의 결핍으로 고전하다 1945년 8월, 일본의 두 도시가 미군의 핵폭탄 투하로 30만 명이 죽고 폐허가 되자, 일왕이 항복을 선언했다. 마침내 한반도에 35년만에 광복이 왔다. 한반도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소리로 진동했다. 정치인들이 각종 조직을 만들어 활동할 때 해산된 성결교회 교직자들이 9월 첫주일에 서울신학교에 모여 광복감사예배를 눈물로 드린 후, 속히 교단 재건총회를 하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11월 9일 교직자 200여 명이 서울신학교 강당에서 성결교회 재흥총회를 개최하고, 해산된 교회를 재건하는 운동을 힘차게 전개했다. 그때 이천영 목사도 황해도 사리원교회를 어렵게 재건하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워장)
2013.10.30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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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교계는 외국에서 학위 받은 목사들이 속속 귀국하여 1960년대까지 ‘현대신학’이란 이름으로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쳤다. 그래서 장로교가 둘과 셋으로 나뉘었고, 주로 성경을 가르친 성결교회는 신학이 없다는 비평을 들었다. 그때 서울신학교 이천영 교수는 활천에 과감히 ‘우리의 신학’이란 제목으로 사중복음을 바탕으로 한 성경중심의 신학론을 무려 4년간(1954~58년) 발표하여 최초로 성결교회의 신학을 천명했고, 또한 최초의 ‘성결교회사’(1970년)를 발간하여 교단 역사신학 정립의 공헌자이다.그의 성장과 헌신그는 어려서부터 이계철(李桂喆)로 불렸다. 그는 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12월 7일 동만주(현 중국 동북지역) 도문에서 이백운 씨의 장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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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본지 전 편집위원장)
2013.10.1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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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총회장이 된 그는 OMS본부가 있는 미국 그린 우드를 방문하고 해외선교를 함께 하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미주 성결교회와도 협정을 체결한 후, 러시아 모스크바 침례교회와도 선교협정을 체결하는 등 교단이 해외선교를 확장하는 데 발판을 놓았다.또한 그는 아태성결연맹을 대만에서 개최할 때 연맹의장으로서 회의를 주재하였다. 또 총회본부가 비좁아 옆 260평의 대지에 총회본부 부속건물(5층)을 건축하는 데 공헌했다. 또한 그는 독일에 있는 성결가족들의 성결인 대회에 참석하여 격려하면서 교단 총회장으로서의 일을 끝까지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리고 1993년 10월 18일, 정년 7개월을 앞두고 사직하여, ‘여진헌 목사 성역 42주년 기념 및 원로목사 추대식과 박대훈 목사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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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3.10.0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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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헌 목사가 군목으로서 한창 군인교회를 부흥시키고 있을 때 군목들도 계급장을 달게 되었다. 1954년 12월 13일부로 문관신분이던 군목들이 과거 목회 연 수를 참작하여 계급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계급장을 달지 않고 본연의 목회를 하기 위해 제대할 것을 결심했다. 광주 육군병원으로 발령을 받자마자 그는 제대신청을 하여 2급 8호봉 문관으로 제대하였다. 그는 전쟁 중 남하하여 서울에 살고 있는 형님 댁으로 찾아갔다. 그는 그곳에 1년 동안 있으면서 장로교의 신학을 배우기 위해 남산에 있는 장로회 신학교에 편입했다. 그래서 그는 장로교회의 목사가 될 수도 있었지만, 1957년 3월에 졸업하고 보니, 성결교회가 더 좋았다. 그는 1957년 5월에 제천군 수산면에 있는 수산성결교회로 부임하였다.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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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3.10.02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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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헌 목사가 군목으로서 한창 군인교회를 부흥시키고 있을 때 군목들도 계급장을 달게 되었다. 1954년 12월 13일부로 문관신분이던 군목들이 과거 목회 연 수를 참작하여 계급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계급장을 달지 않고 본연의 목회를 하기 위해 제대할 것을 결심했다. 광주 육군병원으로 발령을 받자마자 그는 제대신청을 하여 2급 8호봉 문관으로 제대하였다. 그는 전쟁 중 남하하여 서울에 살고 있는 형님 댁으로 찾아갔다. 그는 그곳에 1년 동안 있으면서 장로교의 신학을 배우기 위해 남산에 있는 장로회 신학교에 편입했다. 그래서 그는 장로교회의 목사가 될 수도 있었지만, 1957년 3월에 졸업하고 보니, 성결교회가 더 좋았다.그는 1957년 5월에 제천군 수산면에 있는 수산성결교회로 부임하였다. 이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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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3.10.02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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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란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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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3.09.25 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