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미국 이민과 영향력

이천영 목사는 1970년 교수직 정년은퇴로 정부의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그는 1973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LA에 거주하면서 후배 임동선 목사가 세운 동양선교교회 협동목사로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다. 그가 임동선 목사와는 서울에서부터 각별한 사이였다.

그가 1970년 6월 LA로 여행을 가서 만난 임동선 목사는 유학 중이었다. 곧 석사학위 과정을 마치면 귀국하겠다는 임 목사를 그가 말리며 “LA에 이민자들의 영혼을 돌보는 한국인 교회를 세우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의 간절한 부탁에 따라 임동선 목사가 기도했고, 마침내 그해 7월 26일에 임 목사 사택에서 창립예배를 드렸다. 그때 그가 축사를 했다. 그는 한 달 동안 임 목사와 함께 한인들을 찾아 심방하고 권면하여 초창기 교회 부흥에 협력했다.

사실은 이보다 1년 전, 서울신대 동창 안수훈 목사가 임동선 목사와 자주 만나 “LA에 한인들이 많고, 더구나 성결교 출신과 서울신대 유학생들을 돕기 위해 성결교회를 세우자”고 얘기했었다. 그러나 정작 임 목사가 7월에 먼저 초교파 교회를 세운 배경에는 ‘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초교파적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이천영 목사의 지론이 한 몫을 한 것이다. 

이에 실망한 안수훈 목사가 용기를 내어 그해 11월 7일에 그의 자택에서 ‘나성성결교회’를 설립했다. 이것이 미주 최초의 성결교회이며, 이 교회를 통해 미주지방회와 1980년 미주성결교회 총회가 창립되어, 지금은 250여 교회로 성장하여 성결의 복음을 확산시키고 있다.

이천영 목사가 1973년 미주 이민 직후에는 워싱턴에 거주하면서, 워싱턴성결교회 개척에 협력했다. 그리고 1년 후 LA로 가서 동양선교교회 협동목사로, 장년 성경공부와 평신도신학 특강 등 평소 한국에서 닦은 실력을 아낌없이 쏟아 교회의 질적인 성장에 크게 도왔다. 그 공로가 인정되어 그는 1977년에 그는 동양선교교회의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1980년에 동양선교교회의 신자가 4000명에 육박하여 당시 미국 한인교회 중 최대 교회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불을 뿜는 임동선 목사의 열정적인 설교가 크게 한몫했다. 과연 이천영의 목사의 예상과 꿈이 적중되었다. 그러나 신자들 중 할 일 없는 노년세대가 10%를 넘었다. 

이를 주목한 이천영 목사의 건의에 따라 동양선교교회가 결단하여 65세가 넘은 노년 세대를 위한 상락(常樂)대학을 1980년에 설립했다. 이를 위해 한국에서 교수 경험이 많은 그가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그리하여 그가 초대 학장에 임명되어 교수활동도 겸해서 했다.

당시 LA에 한인이 수십만 명이었고, 그 중 퇴직한 노년 인구가 수만 명으로 그들을 위한 육체, 정신, 영혼을 아울러 돌보는 교육전문기관이 하나도 없었다. 이때 발족한 상락대학은 LA의 한인 노년들에게 한 가닥 희망이어서 수천 명의 학생이 등록하고 활발히 운영되었다.

이를 계기로 1987년 동양선교교회에서 월드미션대학교가 설립되어 평신도 지도자와 교역자들을 양성하였다. 그는 이 대학교의 이사 겸 명예교수로 봉직하다 1993년 월드미션대학교의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받아 평생 신학교육에 힘쓴 그의 공로가 인정된 것이다.

그는 80세의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설교나 교육으로 도왔다. 그러던 중 동양선교회 알래스카 지교회 설립을 위해 가서 돕던 중 과로로 쓰러져 1994년 11월 4일에 소천했다. 그의 유해는 아내가 잠든 할리우드 플레스톤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남 이성호 장로, 차남 이성민 장로, 3남 이성원 목사, 4남 이성우 장로 등은 모두 미국과 캐나다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부친의 뜻을 따라 후손들과 함께 주님의 나라를 섬기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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