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학’을 최초로 연재

6.25 전쟁 후, 한국사회는 구미에서 학위 받아 귀국한 학자들로 지적 수준이 점점 높아갔다. 특히 교계는 자유주의 신학자들로 인하여 장로교가 보수와 진보 교단으로 나눠지고, 감리교신학교는 세계신학의 유행을 따라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쳤다. 그래서 교계는 감리교신학교가 냉천동이어서 냉천신학교라 불렀고, 서울신학교를 가리켜서는 신학 없는 성경학교라고 비꼬기도 했다.  

이천영 교수는 1952년부터 1970년 정년까지 18년간 서울신대 교수를 지냈다. 당시 신학교수들은 틈틈이 활천에 신앙적 논설이나 설교, 강해 등을 게재하여 성결교회 신자들을 성경적으로 은혜롭게 양육했다. 그러나 교계의 이런 냉소적 비난에 마침내 그가 붓을 들었다.

처음에 그는 ‘우리의 깃발’이란 주제로 4회(1953년)에 걸쳐 전통적인 사중복음을 성서신학적인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전개했다. 교장 이명직 목사의 격려를 받은 그는 계속해서 ‘우리의 신학’이란 주제로 1958년까지 무려 42회에 걸쳐 연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그는 성결교회의 신학을 한마디로 ‘복음주의 신학’으로 규정하고 성경중심의 신학을 논리적으로 개진했다.

신학적 분류의 큰 논란의 핵심은 성경관에 있다. 즉, 성경을 인간 지혜의 산물로 보느냐,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거룩한 말씀으로 보느냐에 따라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구별된다. 또는 영감으로 기록한 말씀이라면 기계적 영감이냐, 전체적 영감이냐에 따라 보수주의와 복음주의가 갈라선다. 그는 전체적 영감설을 주장하여 우리교회가 복음주의임을 천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단론’이란 큰 주제 아래 역사적으로 기독교를 혼란시키고 변질시키려는 이단주의자들의 이론을 20여개나 소개한 후, 하나씩 성서적 논리로 통박했다. 이 중에 안식일교회와 로마천주교회를 이단으로 포함시켰고, 당시 설치고 있는 은사 중심의 신비주의와 소위 신(新)신학으로 불리는 자유주의신학의 형태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특히 그는 문학적, 역사적 비평학들을 하나의 고등비평학으로 분류한 후, 이들을 모두 교회의 성장에 해를 끼치는 자유주의 신학에 포함시킴으로써 우회적으로 우리 성결교회의 복음주의 신학의 정통성과 우수성을 고양하기도 했다.

‘우리의 신학’의 논리가 점점 교단 지도자들과 신학생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자, 활천 주간 이명직 목사는 20회부터 ‘우리의 신학’을 활천의 중간 게재에서 권두언 다음으로 옮겨 편집했다. 이는 논설 중 가장 주요 핵심인 논설로 부상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우리의 신학’론이 조직신학적 시각으로 볼 때 성결교회 신학의 전체를 아우르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당시 교계가 보여준 성결교회의 신앙적 애매한 입장, 즉 복음주의라면서 당시 성결교회 교역자들 일부에서 볼 수 있는 극단적 보수주의나 근본주의와의 구별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한 약점이 있다. 

또 성결교회의 신학이 장로교회 칼빈의 개혁신학이나 감리교회 웨슬리의 성화의 신학처럼 신학의 중간적 뿌리의 접목이 애매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는 1960년 대 후반에 웨슬리신학 연구로 학위를 받고 귀국한 조종남 박사와 여타 신학자들에 의해 성결교회의 신학이 계속 연구되고 보완되어 오늘의 성결교회 신학으로 100주년을 맞아 자리매김을 한 것은 자랑이다.

‘성결교회에 무슨 신학이 있는가?’ 당시 교계의 조롱 속에서 당당히 성결교회의 신학이 여기 있다며, ‘우리의 신학’을 처음으로 천명했던 이천영 목사의 공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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