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영접하다

백신영은 1889년 밀양의 백씨 가문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부모의 슬하에서 애지중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백신영이 열여섯 꽃다운 시절에 그의 부모는 좋은 신랑감을 찾아 백년가약을 맺어주었다. 그러나 이 어찌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20세 미만에 남편을 사별하고 보니 앞이 캄캄해졌다. 그녀는 눈물과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절망 속에 동네 교회에 나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소망 가운데 열심히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1910년 조선왕조가 몰락한 후 교회에서 전국농촌계몽운동에 나선 김규식 박사의 부인 김순애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김순애 선생의 강연을 듣고 아는 것이 힘이요 배워야 한다는 도전을 받고 김순애 선생의 모교인 서울의 정신여학교에 입학했다. 그녀는 미션스쿨에서 신앙의 진수와 서양학문에 눈을 뜨게 되면서 새로운 인생관을 갖게 되었다. 곧 하나님을 위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백신영은 정신여학교에서 학업성적이 뛰어난 모범생이었다. 더욱이 신앙이 돈독한 애국동지들과 깊은 사귐을 통해 민족의 구원과 국권을 회복하고 인권을 되찾기 위한 애국심이 날로 고조되어 갔다. 그는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복음전도와 여성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서울신학대학교 전신인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다.

백신영은 경성성서학원에서 3년 동안 열심히 수학하고 1917년 제6회 졸업생으로 졸업한 후 개성성결교회 전도사로 파송되었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결사부장 
백신영 전도사가 개성교회에서 2년 동안 사역하고 있을 때 그의 모교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청빙을 받고 1919년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백신영은 정신여학교 교사 재직 시절에 애국운동에 참여했다. 그에게 신앙과 애국은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10월 17일에 정신여학교의 친미례 부교장 사택 2층에 있는 김마리아의 방에서 비밀리에 여러 여성단체 대표들이 처음 모이게 됐다. 참석한 대표는 김마리아, 황에스더, 백신영 등 16명이었다. 이들은 여러 여성단체들을 통합 정비하여 확고한 조직체계를 구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회합을 되풀이할 경우 시간만 끌다가 일제의 감시망에 포착될 것을 우려하여 당장 임원을 선출하고 조직체의 이름은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명명(命名)되어온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사용하기로 하고 정관을 기초했다. 그때 회장 김마리아가 작성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취지서는 다음과 같았다.

“옛말에 남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고 나라 사랑하기를 내 집 같이 하라 했으니 가족으로서 제 집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 집이 화목하고 복되게 이루어질 수 없고, 국민으로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함은 우부우부(愚夫愚婦)라 할지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 우리 부인들은 국민 중의 일부분이다. 국권을 회복하고 인권을 되찾을 것을 표준으로 하여 앞으로 전진이 있을 뿐이요 추호의 후퇴는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때에 오로지 나라를 사랑하는 우리 부인들은 총궐기하여 용기를 분발하고 그 이상(理想)에 모두가 상진(相進)할 목적으로 본 부인회를 조직하는 것이니 단합을 주로 삼고 일제히 찬동하여 주기를 천명 희망하는 바이다.”

이렇게 하여 탄생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삽시간에 회원이 2000명으로 늘어났고 일제에 정면으로 도전할 것을 천명했다. 그리고 멀리 하와이 호놀룰루의 ‘조선애국부인회’에서 보내온 2000원의 보조금 가운데 일부는 상해임시정부 유지비로 보내는 등 명실상부 애국부인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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