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교계는 외국에서 학위 받은 목사들이 속속 귀국하여 1960년대까지 ‘현대신학’이란 이름으로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쳤다. 그래서 장로교가 둘과 셋으로 나뉘었고, 주로 성경을 가르친 성결교회는 신학이 없다는 비평을 들었다.

그때 서울신학교 이천영 교수는 활천에 과감히 ‘우리의 신학’이란 제목으로 사중복음을 바탕으로 한 성경중심의 신학론을 무려 4년간(1954~58년) 발표하여 최초로 성결교회의 신학을 천명했고, 또한 최초의 ‘성결교회사’(1970년)를 발간하여 교단 역사신학 정립의 공헌자이다.

그의 성장과 헌신

그는 어려서부터 이계철(李桂喆)로 불렸다. 그는 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12월 7일 동만주(현 중국 동북지역) 도문에서 이백운 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 한학자인 조부의 영향을 많이 받아 8세 때 천자문을 떼고, 많은 한문서적을 읽으면서 성장했다. 그의 가족이 신앙의 가정이어서 도문의 한인교회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고, 성경이야기에 흥미가 컸다. 그가 보통학교를 마친 후, 가족이 50리 밖에 있는 명월구로 이사하여, 개척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성결교회에 나간 것이 성결교회와의 첫 인연이다.

그는 김인석 전도사를 도와 일주일에 3번 노방전도회에서 열심히 전도했고, 또 주일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직접 전도하고, 성경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서 많이 모였다. 개척교회는 빠르게 성장했으며, 그는 김 전도사의 중매로 회녕교회 여전도사의 딸 장은숙 양과 결혼하였다.

그는 25세(1935년) 때 장모와 아내의 권면으로 함경북도 회녕(會寧)으로 이사하여 회녕성결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와 집사로 열심히 일하면서 조그만 일본인 회사에 다녔다. 당시 회녕교회는 전서국 목사가 시무했는데, 열심 있는 이계철을 눈여겨보았다. 몇 년 후, 김인석 목사가 회녕에 왔다가 두 분이 함께 그를 서울성서학원에 입학하도록 강하게 권면했다.

그는 새벽기도하면서 주님께 묻기 시작했다. “주여, 나 같은 사람도 주의 종이 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가 기도하고 깊은 명상 중에 있을 때 마음속으로부터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여라.” 

그래서 그는 깊이 생각해 보았다. 지금 직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교회만 오면 신이 나서 스스로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그런지 회녕교회가 자기가 오기 전보다 많이 부흥된 것 같았다. 그는 확신했다. “그래. 내가 할 일은 주님의 일이다!” 

마침내 그는 1939년(29세) 4월에 서울의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다. 그가 입학수속하면서 보니 호적상 이름이 이천영(李泉泳)이었다, 그걸 모르고 그는 오랫동안 이계철로만 사용했었다. 그는 이름을 이천영으로 확정한 후, 활천(1939년 5월)에 이를 알렸다. 얼마나 은혜로운 이름인가.

1940년 성서학원이 일제에 의해 경성신학교로 승격되자, 학생들은 일어시험을 치렀다. 당시 일본인 목사 1인이 와서 일본정신을 가르치고 감시도 있었다. 1941년에 졸업한 그는 원주교회 전도사로 섬기다 1943년 4월 목사안수를 받고 진남포교회로 파송 받았으나 한달 후, 성결교회 교직자 구속에 의해 옥고를 치르고 나오니, 12월에 교단이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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