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장을 마치고 은퇴한 후, 해외선교에 여력을 쏟다

1987년 총회장이 된 그는 OMS본부가 있는 미국 그린 우드를 방문하고 해외선교를 함께 하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미주 성결교회와도 협정을 체결한 후, 러시아 모스크바 침례교회와도 선교협정을 체결하는 등 교단이 해외선교를 확장하는 데 발판을 놓았다.

또한 그는 아태성결연맹을 대만에서 개최할 때 연맹의장으로서 회의를 주재하였다. 또 총회본부가 비좁아 옆 260평의 대지에 총회본부 부속건물(5층)을 건축하는 데 공헌했다. 또한 그는 독일에 있는 성결가족들의 성결인 대회에 참석하여 격려하면서 교단 총회장으로서의 일을 끝까지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리고 1993년 10월 18일, 정년 7개월을 앞두고 사직하여, ‘여진헌 목사 성역 42주년 기념 및 원로목사 추대식과 박대훈 목사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교회를 은퇴한 후에 한 달 만에 그는 모스크바로 가서 새로 출범하는 성결신학교의 초대 학장이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일하는 교단의 젊은 선교사들과 매월 월례회로 모여 기도하고 협력하여 신학교 1, 2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제 넓은 러시아 각처로 성결의 복음을 전파할 사명자들을 양성하게 된 것에 그는 큰 보람을 느끼고 감사했다. 

1995년 2월에 그간의 해외선교 경험을 살려 중국으로 간 그는 젊은 선교사들과 함께 홍콩을 경유하여 하얼빈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중국의 4대 도시 중 하나인 선양으로 자리를 옮겨 사역하는 중에 6개 교회당의 신축을 보조하고, 사역자들을 격려했다.

건강이 여의치 않음을 느낀 그는 만 3년 동안의 해외 선교를 마치고 1996년 11월에 귀국하였다. 그는 ‘목회 성공의 비결’을 묻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목회 성공자가 아니라, 성실한 목회자일 뿐이다. 나의 목회관은 ‘진실과 최선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도움을 구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진헌 목사는 평생토록 자신에 대한 5가지의 원칙을 가졌다. 그것은 진실, 최선, 겸손, 기도, 화해였다. 때로는 이 원칙 때문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어려움을 자초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원칙은 그냥 지켜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원칙을 지키려면 지키려고 하는 당사자의 희생과 헌신이 전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이 활개를 치는 세상에서 진실을 고수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무사안일이 많은 편리를 제공해주는 상황에서 순간순간 최선을 선택하는 긴장감을 간직해야 했다. 교만이 선인 것처럼 여겨지는 삶의 혼란 속에서 겸손한 자리를 떠나지 않고,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는 치열한 전투에서 이겨내야만 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 그는 연약하고 부족한 자신의 한계에 부닥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진실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최선을 다하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는 낮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사역을 승리할 수 있도록 해 준 비결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했다. 그의 평범함이 바로 그의 비범함이었다. 그의 일반적인 삶이 바로 그의 특별함이었다. 여진헌 목사는 평생을 겸손과 화해의 지도력으로 충성스러운 목회사역을 마치고 2008년 7월 9일, 향년 83세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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