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후 목회 여정과 청주 서문교회 사역

여진헌 목사가 군목으로서 한창 군인교회를 부흥시키고 있을 때 군목들도 계급장을 달게 되었다. 1954년 12월 13일부로 문관신분이던 군목들이 과거 목회 연 수를 참작하여 계급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계급장을 달지 않고 본연의 목회를 하기 위해 제대할 것을 결심했다. 광주 육군병원으로 발령을 받자마자 그는 제대신청을 하여 2급 8호봉 문관으로 제대하였다.

그는 전쟁 중 남하하여 서울에 살고 있는 형님 댁으로 찾아갔다. 그는 그곳에 1년 동안 있으면서 장로교의 신학을 배우기 위해 남산에 있는 장로회 신학교에 편입했다. 그래서 그는 장로교회의 목사가 될 수도 있었지만, 1957년 3월에 졸업하고 보니, 성결교회가 더 좋았다.

그는 1957년 5월에 제천군 수산면에 있는 수산성결교회로 부임하였다. 이곳에서 1년 동안을 섬긴 후에 그는 대전에 새로 개척 된 인동성결교회로 목회지를 옮겼다. 이때가 1958년 5월이었는데, 인동교회의 목회는 그에게 큰 시련의 시기였다. 그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보문산에 올라가 부르짖어 기도했다. 기도가 힘들었지만 기도를 통해 그는 연단되고 연단되었다.

1965년 9월에 인동교회를 사임한 그는 분열이 되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천안교회로 부임하였다. 교회당을 신축하던 중에 건축이 중단 된 교회를 수습하여 건축을 완성했을 때, 교회의 부채는 그의 목회를 너무 힘들게 했다. 그러나 계속 눈물로 기도하던 중, 신실한 장로님 한 분의 헌신과 충성으로 부채를 다 갚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천안교회의 목회가 4년차에 접어들었을 때 그는 부산 동광교회의 청빙을 받고 천안교회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의 동광교회는 신자도 많고 부요한 교회였다. 그가 동광교회에서 은혜 가운데 목회하고 있을 때, 갑자기 청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서문교회에서 그를 청빙하였다. 교회에 분쟁이 있어서 그의 화해로운 목회 지도력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만 2년 동안 섬기던 동광교회를 사임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1971년 7월 서문교회로 부임했다. 주일 예배에 400명이 모인다고 소문이 난 서문교회는 그의 부임 첫 주일에 30여명밖에 모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교회가 분열되어 많은 신자들이 나가 ‘신흥교회’라는 이름으로 새로 개척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새로 개척한다는 각오로 전 성도들의 기도와 개별적인 심방을 통해 흩어진 성도들을 모아 부흥이라는 한가지의 푯대를 향하여 집중하도록 했다. 그 결과 교세가 많이 회복되어 그 해 1971년 10월, 3인의 집사를 장로로 장립하였으며, 이듬해 그의 목사 위임식을 거행하였다. 그 후, 해마다 교세가 성장하여 지교회로 3교회(사직/초양/은파)를 개척하였으며, 1979년에 기성신용협동조합을 결성하고, 1986년에 새로 개발되는 봉명동에 교회부지(1,370평)를 확보하고 새 성전 신축 기공예배를 드렸다.

마침내 1986년 12월, 새 성전 입당예배를 드렸다. 새 교회는 대지 1,370평, 총 건평 1,310평으로 총 공사비 21억이 소요되었다. 당시 큰 금액이었다. 그리고 1987년 4월 27일, 성전봉헌식 및 제42회 교단총회를 서문교회에서 개최하였다. 그는 제42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기독교대한성결교회를 대표하고 총지휘하는 큰 목회자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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