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한국성결교회사’ 출간하여 교단 역사 정립하다
1907년 ‘복음전도관’으로 시작된 성결교회는 1970년이 될 때까지 60년이 넘도록 교단의 역사책이 발간되지 못했다. 오직 1929년에 이명직 목사가 발간한 ‘조선야소교 성결교회 약사’뿐이었다. 창립부터 1929년까지 22년간의 기록이어서 초창기 역사연구에는 필수적인 자료였지만 그 후, 교회가 해산되고 교회가 재건되어 성장한 모습을 기록한 것이 아니었다.   

\이천영 목사는 그 자신이 서울신대의 역사학 교수였으나 서양교회사와 한국교회사만 가르칠 뿐 정작 우리 교단의 역사는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2년간의 노력 끝에 그는 대학에서 배운 역사적 서술을 따라 집필한 ‘성결교회사’를 총회출판사 명의로 출간했다. 이는 광복 후 교단 63년간의 성장을 다룬 최초의 저서였다.

당시 그간의 성결교회 성장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자료는 교단 초창기의 역사를 기록한 이명직의 ‘성결교회 약사‘ 이외에는 교단의 유일한 기관지 활천뿐이었다. 하지만 당시 활천 잡지가 전부 모아진 것이 아니라, 낱개로 된 것이어서 모두 구하기가 어려웠다. 이를 위해 그는 활천을 최대한 모으고, 역사적 체계를 세워나갔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성결교회의 근간을 은사이신 이명직 목사가 ‘성결교회 약사’에서 주장한 그대로, 동양선교회(OMS)를 설립한 카우만과 길보른을 선교사로 파송한 만국성결교회에 두고, 그 교회의 신앙노선과 그들의 신조를 그대로 발췌하므로 한국성결교회의 뿌리를 밝혔다.

또 그는 당시 성결교회 60년의 역사 중 1908년을 ‘성결교회 오순절’로, 1921년부터 몇 년간을 ‘성결교회 르네상스’로 부르고, 의미를 부여했다. 1908년은 초창기로,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연동장로교회의 조사 이명헌과 집사 원세성, 배선표 등 쟁쟁한 일꾼들 6명과 그 가족들 20여 명이 교적을 옮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들은 나중에 소명받아 동경성서학원과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초창기 성결교회의 큰 지도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성결교회 르네상스‘의 시대(1921~1929)를 소개하고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경성성서학원 교수인 이명직 목사가 3일간 금식기도를 통해 성결의 은혜를 체험했고, 이 간증을 통해 신학생 회개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전국 교역자들도 합세하여 뜨겁게 기도하고 회개하여 성결을 체험하는 역사가 계속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1921년에 복음전도관 명칭이 성결을 주창하는 ‘성결교회’라는 새 명칭으로 개명되었으며, 1922년에 창간한 월간 활천과 교수들의 설교집과 연구서적이 계속 출간되면서 해마다 5~6권이 발간되어 성결교회의 이 기간을 르네상스라고 한 것이다. 그의 ‘성결교회사’가 출간되자 1년 만에 재판이 되었고 이를 통해 성결교회 역사 연구서적들이 계속 출간되었다.

한 예로, 미국의 안수훈 목사(나성교회)는 이 저서를 중심으로 ‘한국성결교회 성장사’를 연구, 집필하여 1980년에 풀러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또 1971년에 인가받은 서울신학대학원에서 석사 연구 논문으로 교단역사 연구가 계속 다루어졌다. 그리하여 1990년에 총회 역사편찬연구위원회에서 ‘한국성결교회 80년사’가, 그리고 2007년 교단 1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대의 교회사 전공교수들에 의해 ‘한국성결교회 100년사’ 등이 출간되기도 했다.

현 교단에는 각 지교회 역사책, 교회학교 50년사, 성청 60년사, 서울신학대학교 100년사 등 교단의 역사책들이 100여 종 발간되는 등 역사의식이 있는 교단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은 그의 공로였다. 또한 1969년에 서울신학대학의 교가를 그가 작사했으므로 그의 문필가적 자질을 엿볼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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