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습한 감방

‘대한애국부인회’가 이처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으나 불행히도 동료교사 오현주의 배반으로 이 조직은 경북경찰국 고등계 형사 유근수란 자에 의해 탄로 났다. 1919년 11월 28일 전국 각지에서 한날 한시에 애국부인회 간부 및 회원은 물론이고 기부행위를 한 부녀자와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취급당하던 여성들까지 속속 체포되었다. 결사부장 백신영을 비롯한 42명의 애국동지들은 검사국으로 이첩되어 대구형무소 미결감옥으로 옮겨졌다.

백신영과 김마리아는 어둡고 갑갑하고 음습한 감방에서 여러 달을 지낸 까닭에 중병이 들었다. 이에 재판부는 여론의 악화를 두려워하여 1920년 5월 20일에 병보석을 허락했다. 1920년 6월 7일 대구지방법원 제1호 소법정에서 첫 공판이 열렸다. 검거된 애국동지들 가운데 백신영 전도사를 비롯하여 김마리아, 황에스더, 이정숙, 장선희, 신의경, 유인정 김영순, 이혜경 등 핵심 간부 9명만 기소되어 공판정에 출두했다. 그 당시 관경을 ‘동아일보’는 1920년 6월 9일자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 정각 전에 이미 먼 곳에서 방청자가 와서 방청석은 금시에 초만원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굳게 닫힌 문밖에 몰려 앉아서 심문하는 소리를 들으려 했다. 일본인 고미(五味) 재판장은 의자에 앉은 피고인 중 병인(病人) 김마리아와 백신영에게, 두 피고는 병인이니 청년외교단 이병철을 심문하는 소리를 듣기에 몹시 곤란하거든 이병철을 심문하는 동안 나가 있어도 좋다고 했다. (중략) 방청석은 부인네들의 훌쩍훌쩍 우는 소리로 한참 동안 눈물 세상이 되고 말았다. …”

1920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공판기록 기사에 따르면 “흩어진 머리 핼쑥한 얼굴로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장에게 안기어 축 늘어뜨린 채로 죽은 것 같이 누웠는데 재판장이 ‘백신영이 의자에 앉은 채라도 좀 더 앞으로 나오지 못하겠느냐?’ 하니까 피고는 그 정신없는 중에도 어떻게 듣고 ‘아이고 가지요’하고 눈을 힘없이 뜨는데 옆에 그를 안고 앉아 정성스레 부채질도 하여주고 땀도 씻겨 주는 서양 부인들이 의자에 앉은 채로 들어다가 재판장 앞에 놓고 그 다음 김마리아도 그와 같이 들어다 놓았으나 피고는 역시 아무 소리도 없이 한숨만 쉬고는 눈을 다시 감는다.”  

백신영은 결사부장으로서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역적 노릇을 했다는 죄목으로 3년 징역을 구형받았다. 그로부터 20일 후인 6월 27일 고미(五味) 재판장이 내린 징역 1년형 선고를 받았다. 그 후 백신영은 병보석으로 출감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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