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광복과 월남, 개성교회 목회 중 6·25발생

1941년 12월 아시아 석권을 목적으로 소위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처음에는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갈수록 군수물자의 결핍으로 고전하다 1945년 8월, 일본의 두 도시가 미군의 핵폭탄 투하로 30만 명이 죽고 폐허가 되자, 일왕이 항복을 선언했다.

마침내 한반도에 35년만에 광복이 왔다. 한반도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소리로 진동했다. 정치인들이 각종 조직을 만들어 활동할 때 해산된 성결교회 교직자들이 9월 첫주일에 서울신학교에 모여 광복감사예배를 눈물로 드린 후, 속히 교단 재건총회를 하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11월 9일 교직자 200여 명이 서울신학교 강당에서 성결교회 재흥총회를 개최하고, 해산된 교회를 재건하는 운동을 힘차게 전개했다. 그때 이천영 목사도 황해도 사리원교회를 어렵게 재건하고, 흩어진 신자들을 모아 격려하면서 교회의 부흥에 매진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의 얄타협정에 의해 한반도는 광복과 함께 38도선에 따라 남북이 분단되어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점령하고 신탁통치를 시작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이 미군과 유엔의 허락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정부를 수립하자, 북한은 유엔의 허락도 없이 소련의 지원만으로 9월 초에 ‘북조선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공산정부를 조직했다. 북한은 매주일 오전마다 전 주민에게 노동 소집을 시켜 기독교를 탄압하자, 신자들이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어 남하하기 시작했으나, 38선을 지키는 소련군의 경계를 피해야 했다.

그는 1947년 5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죽음을 무릅쓴 월남을 감행하여 가족과 함께 개성에 도착했다. 당시 개성은 38선이 지나는 곳으로 4분의 3이 남한 땅이어서 그는 개성성결교회를 재건하고 목회했다. 그러나 3년 후, 6월 25일 주일 새벽에 북한 인민군이 소련이 제공한 탱크와 무기로 무장하여 남한 전역을 일제히 침략하는 전쟁의 만행을 일으킬 줄 누가 알았으랴.

그는 다행히 이틀 전에 어느 신자의 귀띔으로 서울로 가족과 함께 미리 피신했기에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전쟁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자, 용산 삼각지교회의 2층 다락방 구석에서 가족이 전전긍긍하며 3개월을 숨어 지내며 오직 기도와 성경연구에만 전심했다.

9월 하순에 아군이 서울을 탈환하여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시작해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통일이 되는 듯했으나 11월 중공군의 침략으로 어려웠다. 아군이 이듬해 1·4 후퇴로 서울이 위태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용산역에서 기차 선반 위에서 대전-대구-부산-거제도까지 고생하며 갔다.

1951년 5월 성결교회 부산총회에서 피란신학교를 개교하는 결의에 따라 동래온천교회에서 임시 교사로 개교할 때 그는 신학교 교수로 발탁되어 시급한 가족 생계가 해결됐다. 그의 교수과목은 신약강해와 교회사였는데, 교회사에 관심 있어 틈틈이 연구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1954년 신학교가 서울로 복귀하자, 그는 교수를 하면서 중앙교회 지교회로 약수동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했다. 서울신학교가 문교부령에 의해 1959년 1월에 대학으로 승격하면서 교수들의 자격을 요구했다. 다행히 미국 유학 중인 몇몇 목사들이 귀국하여 교수로 취임했다.

이천영 목사는 2년 전부터 교회사 교수를 위해 단국대 역사과 3학년 야간부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학위를 가졌기에 문교부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1960년 4·19 흐름에 동조한 신학생들의 데모로 반발이 일어나, 당분간 전수과 학생들만 교수하는 등 헤프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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