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출생과 성장

김일환(金日煥)은 울산 김씨 양순의 장남으로 1922년 3월 26일 한반도의 땅끝 마을 전남 해남군 산이면 초성리에서 모태신자로 출생했다. 1902년 미국 남장로교의 오웬 선교사가 세운 초성교회에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신앙생활을 한 덕분에 그는 갓난아이 때부터 주일마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 온 가족과 함께 교회에 다녔다.

그는 5세부터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한문을 배우고 붓글씨로 한문을 쓰기 시작하여 평생을 붓글씨와 글쓰기를 유일한 취미로 즐겼다. 그는 8세에 20km가 되는 읍내 초등학교를 동네 큰 아이들을 따라 뛰어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일제강점기여서 학교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쳤고, 말도 일본어로 해야지 조선말을 하다 걸리면 벌을 받아야 했다. 그도 한 번 걸렸지만, 그렇게 걸리지 않은 학생은 별로 없었다. 그는 집에 오면 한글로 된 찬송가를 붓으로 써서 벽에 붙이고 찬송을 힘차게 불렀다.

그는 공부를 잘해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목포의 명문인 목포상업전수학교(현 목포상고 전신)에 입학했다. 그는 열심히 노력해서 장차 큰 기업가의 꿈을 품었다. 중학 5년 과정을 모두 마친 그는 해남읍 금융조합에 특채되어 금융가의 꿈을 키워 나갔다.

하지만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日帝)는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금융통제와 농산물 공출을 과도히 실시하여 농민들은 해마다 땀 흘려 일한 농산물을 거의 절반이나 빼앗겨 고통을 받았다. 그는 나라 잃은 백성의 슬픔을 느끼고, 나라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는 1944년 고향 처녀 김영자와 결혼하고 신앙의 가정을 이루었다.

마침내 하나님 은혜로 1945년 조국이 광복을 맞자, 그는 좀더 큰 일을 하기 위해 목포로 이사했다. 그는 곧 목포항도여중의 서무과 직원으로 취직했는데, 경리업무의 경력과 글씨를 잘쓰는 것이 탁월하여 특채되었다. 그는 집에서 가까운 장로교회에 아내와 함께 출석했다.

그가 어느 날 광주의 도청 학무국에 출장 갔다가 도청 옆 제일교회 앞에서 노방전도대를 만나 이성봉 목사가 부흥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갑자기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날 밤 집회에 갔다가 은혜를 받고 오히려 그의 신앙에 도전을 받았다.

압도해 오는 부흥사의 능력 있는 말씀 앞에 그는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 이 산을 바다에 던져도 할 수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왜 나는 그런 믿음이 없는가? 나는 3대째 신자인데도 도무지 그런 믿음이 없으니, 나도 신자가 맞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직장 때문에 이튿날 새벽 차로 목포로 왔지만 이때부터 믿음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듬해인 1946년 가을 오후였다. 그가 군청에 갔다가 입구에서 노방전도대가 나팔과 북으로 찬송을 부르고 설교하면서 “훌륭한 부흥사 이성봉 목사님의 부흥회가 오늘 밤 북교동교회에서 있으니, 모두 와서 은혜를 받으라“고 광고했다. 이성봉 목사라는 말에 그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저녁을 먹은 후 북교동교회로 갔다. 이성봉 목사의 말씀이 처음부터 그를 사로잡았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것이 천국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할 때 그는 가슴이 뜨거워지며 자기도 모르게 “주여!”하고, 어려서부터 지은 죄를 토하며 눈물을 쏟았다. 죄를 회개하고 나니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임했다. 장로교회에서는 맛보지 못한 은혜였다. 그는 은혜를 체험하고, 즉시 교회를 북교동교회로 옮겨 평생 성결교회 성도로 살았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