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교회 신사참배거부운동

백신영은 출옥 후 다시 전도자의 길을 택했다. 1922년부터 1927년까지 충남 강경교회 전도사로 파송받아 그 교회에서 6년간 사역했다. 그 당시 일본제국은 신사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요하는 시기였다.

1924년 백신영 전도사가 부임한 강경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최초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24년 10월 11일 일본이 제일(祭日)을 맞아 강경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신사참배에 동원했다. 다른 학생들은 신사에 참배했으나 강경보통학교 교사 김복희 와 그가 인솔하는 57명의 학생들은 불참했다.

김복희는 강경교회 주일학교 교사였고 학생들도 대부분 강경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들은 헛된 신에게 절하는 것이 무지한 미신이며 또한 하나님 앞에 죄됨을 깨닫고 신앙을 꿋꿋이 지키며 절하지 않았다. 이것은 중대한 학교 문제로 부각되었다. 그래서 교사와 학생을 한 명씩 취조하여 잘못했다고 항복하지 않으면 교사는 면직하고 학생은 퇴학시키겠다고 위협했으나 교사와 학생들은 다같이 여기에 불복했다.

이 문제는 총독부 학무국에까지 알려져 총독부 학무국장이 강경에 직접 내려와 충남학무국 당국과 교장이 이 문제를 협의했다. 하지만 교사를 면직하거나 학생들을 퇴학시킬 법적 조건이나 학칙을 발견하지 못했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조상의 제사에 절하지 않으면 때리고 밥도 굶겨 보았으나 끝까지 말을 듣지 않자 신앙의 자유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고 방임하였다고 했다. 또한 학부모들은 이 학생들이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이전의 행동보다 더 아름다워져서 구태여 절하는 것을 강요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학교의 모든 규칙을 잘 지켰는데 단지 절하지 않았다고 퇴학시키거나 문제를 삼을 수도 없다고 했다.

교장은 김복희 선생을 불러 권고사직을 시키고자 했으나 김복희 선생은 “내가 면직은 당할지언정 사직은 아니하겠노라”고 자신의 굳은 의지를 밝히고는 면직을 당했다.          

이 사건은 기독교계 사립학교가 아닌 공립학교에서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 이룩한 신사참배거부 사건이다. 이후의 많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선교사가 운영하는 미션스쿨에서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뤄졌는데 비해 강경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공립학교에서 한국인 주일학교 교사의 주도로 이뤄졌다는 점에 의의가 컸다. 이것은 성결교회 신앙교육의 파장이 학교 현장에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학부모까지 일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주장을 지지했다는 것은 매우 의의가 있는 일이다. 강경교회의 이 사건은 1924년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3·1운동 당시 이 지역을 방문했던 동양선교회 토머스 감독을 일본 경찰이 구타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일본은 엄청난 배상을 하였고 강경교회는 바로 그 배상금으로 지어졌다.

또한 이 교회에서 사역한 사람이 백신영 전도사였다. 그녀는 1920~1929년 강경교회에서 전도사로 헌신하면서 특별히 주일학교를 부흥시켰다. 그녀는 주일학생들에게 철저한 성결인의 체험적 신앙과 투철한 애국심을 심어줬다. 1924년 일어난 강경교회의 신사참배거부 사건은 토머스 선교사와 백신영 전도사가 철저한 신앙교육과 투철한 애국심을 불어넣은 역사적인 배경 아래서 일어났다. ‘활천’은 이것을 믿음의 승리라고 기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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