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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구는 동경으로 가서 일단 하숙집을 정한 후 몇 고등보통학교(중학과정)를 알아보았으나 편입하려면 한결같이 요구하는 것이 그의 중학교 중퇴했다는 증명서류였다.그는 할 수 없이 일단 동경예비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서 배우면서 시험을 통해 4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그는 동경에서 공부하는 동안 숙소에서 가까운 나사렛교회를 찾아갔다.요다 도요이찌 목사는 거의 중생과 성결에 대한 설교만 하는 성결파 목사였다. 장로교회 출신인 그는 처음 듣는 설교여서 이상하게 여겼으나, 알고 보니 중생과 성결은 성경에 많이 있는 말씀이었다.계속해서 교회에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성결인물연구소장)
2021.02.2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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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구(金太九)는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1921년 7월 2일 부친 김민수와 모친 이삼막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땐 일제강점기였으나 조선 말기의 정치가문 안동 김씨의 후손으로 조상 때부터 유교를 숭상하는 천답지기 부호의 집안이었다.마을 사람들이 거의 그의 집 토지를 소작하였기에 그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도련님’으로 불리며 자랐다.그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6살 때부터 10살 때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느라 7살에 입학하는 보통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그러나 다행히 10살 때 마을의 상월장로교회 주일학교에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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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성결인물연구소장)
2021.02.17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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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암을 이긴 조 권사는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도하며 쉴 새 없이 다녔다.그뿐 아니라 군부대까지 위문하고 전도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해 예수님을 영접한 군 장병들이 주일이면 20∼30명씩 만현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등 교회가 크게 부흥되자 30평 교회는 비좁아 50평으로 확장, 다시 교회를 신축하게 되었다. 새벽마다 두세 시가 되면 기도하러 나갔고 새벽종까지 치면서 교회 부흥에 앞장섰다. 조광녀 권사가 수술비 전액을 건축헌금으로 드리자 1978년 11월 7일 기공예배가 시작되었다. 회갑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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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성결인물연구소)
2021.02.03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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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이 완공되고 1967년 입당예배를 드린 후 김말준 목사는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고아를 위해 고아원과 성애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조광녀 집사는 물심양면으로 교회와 학교를 위해 헌신했다. 양구성결교회는 지역사회에서도 인정을 받아 교인들은 날로 증가했다. 1956년에 양구군 해안면이 남한 최전방으로 수복되어 군민 합동으로 15평 판자로 지은 만현교회가 다 허물어져갔다. 이 소식을 듣고 조광녀 집사는 1972년 4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해안면으로 갔다.민통선 안에 사는 영혼들을 위해 새벽마다 담요를 쓰고 허물어진 교회당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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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성결인물연구소)
2021.01.2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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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의 기쁨도 잠시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해 청년들은 군대로 끌려가고 월남한 피난민들은 또 피난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큰아들 영재는 20세 청년으로 춘성군 연여골 숲속 산판에서 일하며 가족생계를 책임졌으니 산판 옆에 통나무집을 지어 함께 살았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든든한 장남이 있어 한시름 놓았는데, 갑자기 인해전술로 밀려오는 중공군 때문에 임산부 아내를 두고 장남은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에 입대했다. 차남 영석이도 공산군에게 붙들려 의용군으로 끌려갔고, 꽃샘 추위 3월에 자부는 진통이 시작되었다.조광녀는 산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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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성결인물연구소)
2021.01.20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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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조국에 광복이 찾아왔다. 어느 날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 소리를 지르는 국민들을 행상길에서 만났다. 1945년 8월 15일이었다. 해방이라는 기쁜 소식에 접한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넘치며 무한한 미래가 보였다. 이제 농사지어 창고에 쌓아 두고 마음대로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기대에 넘쳤으나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30대 초 젊은 과부가 북한 땅 양구에서 속초 거진항까지 200리 길을 보따리를 이고 다니면서 거진항에서 어물을 사서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동네마다 찾아 팔러 다녔다.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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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성결인물연구소)
2020.12.23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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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녀 권사는 1912년 강원 춘성군 수산리에서 한학자 조문현 씨의 장녀로 출생하여 훈장인 아버지 밑에서 동네 서당의 남아들과 함께 천자문을 배우며 자랐다. 그때는 여아에게 공부 시키지 않는 유교사상이 있었지만 그가 남자처럼 활달하고 배우려고 하기에 허락한 셈이다.아버지는 그녀가 12살에 천자문을 떼자 “여자로서 그만하면 됐다”라고 이제부터 어머니 밑에서 살림을 배우며 시집갈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조 권사는 어머니를 도우며 하나씩 하나씩 살림살이를 배우고 읽히면서 장차 좋은 신랑을 만나 행복하게 살 꿈을 꾸며 살았다.그녀가 1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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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성결인물연구소)
2020.12.1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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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정태희 장로는 무덤도 없고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정 장로가 순교할 당시 딸 4명이 있었는데 그 딸들은 정 장로가 순교한 뒤에 궁핍한 생활로 고생하며 살다가 10여 년 동안 한 사람 한 사람씩 질병으로 모두 요절(夭折)했다. 그 결과가 예수 믿고 쫄딱 망한 집이라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 조국 광복이 되고 한국교회가 부흥·성장·발전되었지만 군산성결교회 젊은 장로의 순교 사화는 세월 속에 묻히고 말았다.다만 몇몇 학자가 “일본제국 말기에 한국성결교회가 수난당했다”라고 정태희 장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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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20.11.25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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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목사가 석방된 다음 날, 1943년 6월 1일부터 정 장로에게 심문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담임목사만 오면 석방한다더니 그때부터 잔혹하게 고문하며 심문을 시작했다. “예수가 높으냐? 천황이 높으냐?” “예수는 하나님이신데 세상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사람 몸을 입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시어 40일 후에 승천하시고 세상 끝날에 다시 오시어 죄악 세상을 심판하시고 천년왕국을 세우실 만왕의 왕이시고, 천황은 일본제국을 통치하는 일본의 지존한 분으로 알고 있소.” “예수는 어느 때 오는가?” “하나님 외에는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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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20.11.1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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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부의 지령으로 자진 해산형식으로 미리 작성한 ‘해산성명서’를 발표하게 했다. 해산성명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①장기간 미국 선교사의 지도와 재정적인 의존으로 부지불식간 영미 사상에 세뇌되어 그 잔재를 말살하기 어려웠음은 유감으로 생각된다. ②재림사상은 그리스도가 지상의 왕이 된다는 주장으로 일본국가이익에 부적합하다. ③구약성서는 유대 사상에 두어 일본 국체에 반하는 종교로서 국민종교로 성립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가혹한 고문에 굴하지 않고 순교한 분은 박봉진 김하석 목사와 정태희 장로, 김지봉 집사다. 두 분 목사는 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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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20.11.04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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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41년 최헌 목사가 군위지역 부흥회에서 한 설교를 문제 삼았다. 고등계 김수암 순사가 군위 성동교회를 수색해 독립사상의 노래로 분류된 금수강산, 에덴동산, 아이들의 임금은 누구뇨 등 노래를 부른 혐의로 최헌 목사와 은희천, 정영식 장로와 교사들을 구속했다. 이들은 가죽끈으로 난타당해 전신에 시퍼렇게 멍이 드는 등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금화성결교회 신자 한정우는 “독일과 일본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마지막 승리는 결국 그리스도다. 일본 천황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숭경존모(崇敬尊慕)하지 않으면 심판받는다”는 언동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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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20.10.28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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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중 한국성결교회는 재림 신앙 때문에 일본의 박해를 받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단이다.일본은 재림 신앙이 일본의 국가체제와 대립 된다고 인식했다. 일본의 성결교회 박해는 일본의 홀리네스(성결)교단부터 시작되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국체명징(國體明徵), 인고단련(忍苦鍛鍊)의 국민운동을 결정했다.국체명징은 나라의 본질을 증거로써 명확히 한다는 것으로 나라의 본질은 천황에게 있으니 천황에게 절대 충성하자는 운동이다.인고단련은 괴로움을 참고 몸을 튼튼히 한다는 뜻으로 지금 전쟁이 일어났으니 몸이 아프고 고달프지만 괴로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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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20.10.1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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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어느 날 안수훈 목사와 임동선, 이기홍 목사와 장로교, 침례교 등 10여명으로 구성된 유럽공산권의 선교가능성 타진을 위한 여행단이 LA공항을 출발했다. 미국시민인 그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비자를 받아 공산권 종주국인 소련의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최고의 호텔이라는 숙소는 미국의 삼류호텔보다 못했고, 식사도 형편없었다. 그들은 소련 위성국인 우즈베키스탄, 카잔스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에 가서 둘러보았지만, 그곳들은 모스크바보다 더 형편없었다. 안 목사 일행은 귀국 길에 동독과 서독을 거쳐 LA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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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20.10.0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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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훈의 생애에서 1973년은 의미 있는 해였다. 그것은 안 목사의 기도대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미주지방회가 탄생했기 때문이다.그 해 1월 21일 나성성결교회에서 목사 12명, 장로 1명이 모여 제1회 미주지방회를 개최하여 산파역을 한 안수훈 목사가 제1회 지방회장에 피선되었다. 그리고 그 해 5월 1일에 한국성결교회 제28회 총회에서 총회직할지방회로 인준을 받았다.신자들이 자나깨나 단독교회당을 세우게 해달라고 기도한 지 6개월 만에 기도의 응답이 왔다.별로 멀지 않은 한인침례교회가 다른 곳에 대지를 마련하고 건축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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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성결인물연구소장)
2020.09.23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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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훈 목사는 미국에 아직 한인성결교회가 없어, 그가 한인성결교회를 세워 4중복음을 전 세계로 전파하는 전초기지를 삼으려고 기도했다. 어느새 그의 자녀들이 5남매로 7식구가 되었고, 나이 43세였다. 마침내 그는 1967년 5월 21일 오전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큰 꿈을 향해 한국을 떠났다. 안목사가 LA에 도착하여 공항 밖으로 나오니 송박사가 보낸 홍창호 집사 내외가 그를 맞았다. 안 목사는 홍 집사의 아파트에 가서 유숙했다. 그러나 그가 부임할 ‘대한인기독교회’ 목사가 전임을 약속했는데, 전임할 교회에 사정이 생겨 떠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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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성결인물연구소장)
2020.09.0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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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훈 목사는 첫 임지로 강원도 김화지역의 제27육군병원에 파송되었으나 군복만 입고, 모자에 십자가만 붙이고 일했다. 그는 이듬해 서울 근교에 있는 육군 제36병원으로 전임되어, 부상병 위로와 기도에 힘쓰면서 주일 예배를 인도했다. 부상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는 병원장 허락으로 간호장교와 간호하사관들로 합창단과 중창, 독창을 연습시켜 1951년 8월 어느 토요일 위문공연을 개최했다. 위문공연장에는 서울 체부동교회 전승순 장로가 참석했다가 위문공연을 지휘하는 안 군목을 발견하고 반겼다. 전 장로는 교역자가 없어 주일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음을 호소하고 자기 교회에 가서 교회를 재건하자고 권했다. 안 군목은 그가 수시로 찾아와 계속 부탁하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전역을 신청하고 1951년 9월 체부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성결인물연구소장)
2020.09.02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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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친척 하나도 없는 서울에서 그는 뜻밖에 체부동성결교회 한명우 목사를 만난다. 그의 딱한 형편을 안 한 목사는 그의 사택에서 숙식하도록 했다. 그는 월남직전 담임목사에게 중앙신학교를 소개 받았기에 중앙신학교를 찾아갔다. 그는 성화신학교 1년 경력을 인정받아 신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당시 신학교는 3년제였다. 그는 한명우 목사의 소개로 돈암동교회 전도사로 일했다. 그는 1949년 5월 초교파인 중앙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고민하다 한명우 목사의 권면에 중앙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성결교회 신자가 된다. 그는 서울신학교에서 열정적인 신앙과 선교정신을 배운 후. 평생토록 성결교회 성직자의 길을 가기로 확정하고 기도와 신학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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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성결인물연구소 소장)
2020.08.19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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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훈(安秀勳)은 황해도 황주에서 1924년 4월 6일에 부친 안병촌과 모친 박관문 사이에서 10남매(5남 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때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된 강점기였다.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조선인들을 학살한 일제는 세계 여론의 비난으로, 1920년에 유화정책을 폈다.그것은 신문과 잡지 발행을 허가함과 동시에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위해 각 면마다 공립 소학교를 건립하였는데, 그의 고향 영풍면에도 영풍소학교가 설립된다. 그의 부친은 일본을 싫어했으나 소학교에서 한글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소학교에 입학시킨다. 그는 4학년 때, 친구의 전도로 마을 긴골장로교회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안수훈은 교회에서 성경을 배우면서 민족의식에 차츰 눈을 뜬다. 특히 모세가 하나님의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성결인물연구소 소장)
2020.08.1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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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규 목사는 목회 초창기에 영적 깊이를 추구하느라 전남 신안군 도덕도에서 머리를 깎고 양도천 목사와 함께 지냈고, 서울 삼각산 굴속에서 40일을 기도했다. 전남 장성 남경산과 대천 성주산에서 20일, 서울 관악산 기도원에서 3개월 등 그야말로 영적 깊이를 위해 몸부림을 친 시절이 있었다. 영적 깊이를 파는 기도에 영력이 샘처럼 솟아올랐던 것이다. 그의 성령역사의 기폭제가 된 계룡산 양정기도원 성회, 그리고 길산교회의 폭발적 부흥으로 능력 있는 부흥사가 되었다. 침례교회의 오관석, 김충기, 이천석, 고승혁 목사 등도 당시 이 사명자성회에서 은혜받고 능력 있는 부흥사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최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역시 목사는 은혜 체험이 분명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 최동규 목사는 평생
일화이야기
정병수 목사(성결인물연구소)
2020.08.05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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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교역자들이 대부분 그랬다고 하지만 특히 최 목사는 가난을 마다 않고 벗 삼아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도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최 목사의 평생의 친구인 태성리교회의 황의철 목사가 방문했다. “종진아, 밥 먹었니?” 종진이는 서울신학대학교 총장을 지낸 장남 최종진 박사다. “엄마가 준 풀을 먹었어요.” 엄마는, 밥이 없어서 다섯 살짜리 아들에게 추석 준비로 방문을 바르고 남은 풀을 먹일 수밖에 없었다. 황의철 목사의 말이다. 부흥회를 갔는데, 식사를 하고 일어서니 종진이가 “즈덜은 밥 먹고 나는 풀을 주고…….”하며 울더란다. 최종진 박사의 말이다. “길산교회에서였다. 어머니는 신자들한테 쌀 없는 걸 안 보이려고 했다. 나는 어머니와 솥에 눈을 퍼다 넣고 밥 짓는 시늉을 했다. 담장에 바싹 말라붙은
일화이야기
정병수 목사(성결인물연구소)
2020.07.22 1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