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휴전, 양구가 남한에 귀속, 양구성결교회 개척멤버

재회의 기쁨도 잠시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해 청년들은 군대로 끌려가고 월남한 피난민들은 또 피난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큰아들 영재는 20세 청년으로 춘성군 연여골 숲속 산판에서 일하며 가족생계를 책임졌으니 산판 옆에 통나무집을 지어 함께 살았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든든한 장남이 있어 한시름 놓았는데, 갑자기 인해전술로 밀려오는 중공군 때문에 임산부 아내를 두고 장남은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에 입대했다. 차남 영석이도 공산군에게 붙들려 의용군으로 끌려갔고, 꽃샘 추위 3월에 자부는 진통이 시작되었다.

조광녀는 산모의 진통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몹시 애태웠는데 드디어 첫 손주가 태어났다. 그동안 산속에서 피난살이하며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첫 손주를 보니 그간의 고생도 잊은 듯 기쁘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또 행상을 떠날 결심을 해야 했다. 

다행히 차남 영석은 중공군에게 붙들려 현 춘천댐(모진 강) 근처까지 가다가 달리는 트럭에서 죽을 힘을 다해 뛰어 내려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북한과 인접해 다른 지방보다 열병이 기승을 부리고 포탄과 총탄이 비처럼 쏟아졌지만 가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협정되고 북한이던 양구가 남한으로 수복되어 피난생활을 끝내고 고향땅 옛 집으로 온 식구가 기쁜 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거의 파괴가 된 집을 보니 낙심이 되었으나 재건해야 한다는 결심과 함께 북한이 몰수해간 논밭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조광녀는 젊은 시절 행상으로 다져진 경험으로 양구 시장에다 포목점을 내고 생활의 안정을 되찾아 갔다. 양구에는 아직 교회가 하나도 없었지만, 서울신학교를 졸업한 김정자 전도사가 1954년 양구를 찾아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으나, 처음에는 조광녀도 무관심하였다.   

그런데 셋째 영조가 전도 받아 몰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영조가 말했다. “엄마, 교회에서 부흥집회가 있으니 한번만 같이 가요”하면서 매달렸다.

“이 바쁜 몸으로 어떻게 가니?” “그래도 한번만 같이 가 봐요” 하고 사정을 해서 아들을 따라갔는데 집회 중에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정자 전도사의 지도로 신앙이 성장하게 되었고, 조광녀를 따라 온 가족이 교회에 가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1954년 서울신학교를 졸업하고 군목을 제대한 김말준 목사가 개척사명으로 양구에 와서 천막을 치고 양구성결교회 개척을 시작할 때 김정자 전도사와 조광녀 성도, 장남 박영재, 자부 이금례 등 온 식구가 개척 멤버로 참여하여 양구성결교회가 시작되었다. 

천막을 치고 천막교회로 개척을 시작했지만 피난민을 중심으로 교회는 날로 부흥이 되었다. 1957년 1월 1일 김말준 목사로부터 조광녀 성도는 집사로 입명을 받았다.

조광녀 집사는 구령열이 뜨거워 언제나 새벽 3시면 일어나 새벽기도회를 다녔고 전도와 교회헌신에 앞장서서 수많은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였다. 평소 활달한 성품으로 양구 여성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잠자는 여성들을 일깨우는데도 최선을 다했다. 

그뿐 아니라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보살피며 몇 명은 수양아들로 삼아 그들을 뒷바라지했다. 교회와 사회를 위한 공로가 대단함을 양구군에서 인정받아 1957년 5월 8일 어머니의 날을 기념하여 제정한 ‘장한 어머니 상’을 정부로부터 받았다. 

양구성결교회를 건축할 당시 부흥식당을 운영하던 조광녀 집사는 자부 이금례 집사와 같이 고정 인부 20여 명에게 돈 한 푼 받지 않고 3개월간 식사 전부를 담당했다. 신앙이 투철하고 언제나 교회 일에 앞장섰기에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감당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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