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이 왔으나 공포의 공산정치 싫어 탈북

마침내 조국에 광복이 찾아왔다. 어느 날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 소리를 지르는 국민들을 행상길에서 만났다. 1945년 8월 15일이었다. 해방이라는 기쁜 소식에 접한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넘치며 무한한 미래가 보였다. 

이제 농사지어 창고에 쌓아 두고 마음대로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기대에 넘쳤으나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30대 초 젊은 과부가 북한 땅 양구에서 속초 거진항까지 200리 길을 보따리를 이고 다니면서 거진항에서 어물을 사서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동네마다 찾아 팔러 다녔다.

이렇게 애써 모은 돈으로 마련한 조그만 논과 밭떼기를 몽땅 빼앗기고 말았다. 소련군과 김일성 공산당 무리들이 토지개혁이라는 이름으로 1947년 지주들의 토지를 다 몰수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준다고 하더니 마을마다 가난한 공산당원 몇 가정에만 혜택을 주었다.

북한에 공산정부가 들어서자 본격적으로 억압과 착취가 자행되고 공포정치가 계속되면서 동족끼리 이념전쟁은 날로 심해져 갔다. 남과 북이 대치상태로 들어갔지만 그런 중에도 소련군이 지키는 38선을 넘나들며 요령껏 장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조광녀도 생계를 위해 북쪽에서 생산한 것들과 마포를 남쪽의 춘천이나 서울 등지에 팔고 화장품이나 간단한 의약품을 사서 북쪽으로 가져다 집집으로 다니면서 왕복 장사를 했다. 그런데 젊은 여자가 38선을 넘어 남한과 내통한다는 밀고가 들어가 양구 내무서에 잡혀갔다.

간첩활동을 했다고 고문과 문초가 서슬 퍼렇게 시작되었다. 입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어린 자녀들 굶겨 죽이지 않으려고 무거운 것 이고지고 발이 닳도록 젊디젊은 과부가 행상 한 것이지 남한과 내통하여 간첩질 한 것이 아니다”라고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평소에 그녀를 안쓰럽게 보아왔던 마을 사람들의 덕택으로 첩자노릇 했다는 그 지긋지긋한 문초와 고문은 끝나고 3개월 만에 무혐의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광녀는 요시찰인 인물로 지목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공산치하 횡포에 더 이상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조광녀는 결국 남한에 자유가 있어 이곳을 탈출하기로 작정했다. 식구들을 다 데리고 갈수 없어 큰 아들과 셋째 영조, 막내 영률에게 “엄마가 곧 너희들을 데리러 올테니 잘 지내고 있어라”하고, 둘째 아들 영석만 데리고 북한을 탈출하는 피난대열에 합류했다.

탈출대열은 안내원의 지도로 낮에는 숲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걷고 또 걸어 3일만에 38선까지 와서 틈을 타 1947년 10월 25일 탈출에 성공했다. 험한 길을 걸어 1200고지를 넘은 조광녀는 샘밭수용소에 도착해 신분조사와 예방접종까지 모든 수속을 마친 후 춘천시 퇴계동에 정착했다. 

월남한 피난민들에게 남한 정부에서 주는 소량의 식량배급과 구호물자를 받아 그런대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자나깨나 북에 있는 자식들 걱정에 편할 날이 없었고 하루속히 데려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돈을 모아야 했기에 그녀는 발이 부르트도록 다니면서 막노동도 마다치 않고 어떤 일이든지 써주기만 하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북에서는 조 여인이 갑자기 둘째 아들과 함께 사라졌으니 당국의 감시가 더욱 심해져 형제가 하루 두 끼도 먹기 힘들었다. 이를 보다 못한 이웃들이 의논하여 형제들을 이집 저집에서 데려다가 밥을 먹이면서 잠을 재웠다. 남으로 간 엄마는 올 기약도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찾아왔다. “빨리 떠나자 여기 있으면 우리 다 죽는다.” 이웃에 살던 큰 아버지는 거친 길 가기 어려운 5살 막내를 지게에 지고 이틀을 걸어 사명산 기슭까지 와서 내려준 후 북으로 돌아갔다. 가족들은 조광녀의 결단으로 남한까지 오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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