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세 과부가 된 설움을 이기고
조광녀 권사는 1912년 강원 춘성군 수산리에서 한학자 조문현 씨의 장녀로 출생하여 훈장인 아버지 밑에서 동네 서당의 남아들과 함께 천자문을 배우며 자랐다. 그때는 여아에게 공부 시키지 않는 유교사상이 있었지만 그가 남자처럼 활달하고 배우려고 하기에 허락한 셈이다.
아버지는 그녀가 12살에 천자문을 떼자 “여자로서 그만하면 됐다”라고 이제부터 어머니 밑에서 살림을 배우며 시집갈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조 권사는 어머니를 도우며 하나씩 하나씩 살림살이를 배우고 읽히면서 장차 좋은 신랑을 만나 행복하게 살 꿈을 꾸며 살았다.
그녀가 17세가 되자 아버지가 결혼을 서두르며 매파를 통해 널리 신랑감을 구했다. 그런데 마침 매파의 소개로 양가 어른들이 만나서 혼인을 결정하고, 1929년 12월 24일에 신부집에서 결혼식을 했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남편이 착하고 부지런했지만, 아내가 힘이 좋고 더 부지런해서 살림도 차츰 늘었고, 아들만 4형제를 낳아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밤이면 길쌈을 하며 고단한 날들이지만 아이들이 잘 자라 행복이 계속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은 어느 날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아픔을 호소하더니 그만 순식간에 쓰러지고 말았다.
“영재 아버지! 영재 아버지! 이 어린 것들 데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요, 어떻게 살아. 일어나요, 일어나” 땅을 치며 피를 토하듯 통곡했지만 심장마비로 남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막내 아들이 겨우 돌이 지났는데 1943년 2월 39세 젊은 나이로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큰 아이가 겨우 13살이니 눈물만 흘릴 여유가 없어 아이들 때문에 더욱 부지런히 농사에 매달렸다. 그러나 때가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점점 패전으로 기울어가는 형국이어서 전쟁물자 조달에 극에 바쳐 땀 흘려 농사를 지어도 공출이란 명목으로 식민지인들에게 소소한 것까지 다 약탈해 갔다. 너나 할 것 없이 죽지 못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해 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농사일에 큰 몫을 담당했던 소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혼자서 소를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험한 도솔산까지 올라갔는데 호랑이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너무 놀란 가슴을 안고 숲속에 엎드려 있으니 호랑이가 골짜기로 사라졌다.
그녀는 어둑해진 산을 숨을 헐떡거리며 정신없이 뛰어내려왔다. 어린 아이들은 엄마만 보면 “배고프다”고 칭얼대니 살 소망마저 없는 긴 터널이었지만, 세상이 악하다고 한숨만 쉴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데 돌 지난 아이까지 네 아들을 두고는 무엇을 하랴?
그녀는 깊이 생각하다 할 수 없이 장남인 초등학교 5학년, 14살 된 영재를 결혼시켜 자부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마치 참한 17세 규수가 있어 결혼을 서둘렀다. 규수의 부친은 양구 해안면 마을 훈장 어른이었으나 연성소를 졸업하고 일본군 위안부로 지정된 딸을 보며 걱정만 했는데 마침 신랑이 있다니 끌려가지 않으려면 속히 시집을 보내야 했다.
그리하여 1944년 11월 22일 3살 아래인 박영재 어린 신랑과 결혼식을 올리고 33세 시어머니 집으로 시집을 왔다. 그때 차남 영석은 11세, 삼남 영조는 7세, 막내 영률은 3세였다. 남편은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가정을 이끌어가기는 너무 어린 초등학생이었다.
17세 새댁은 먹을 것까지도 허덕이면서 손빨래로 살림을 도맡아 때로는 눈물을 훔치면서 시동생들을 키워야만 했다. 이제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얻었으니 아들들을 다 맡기고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행상을 시작하기 시작했는데, 양구에서 떠나 동해 바닷가 속초까지 걸어 다니며 장사하는 고달픈 생활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