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교회에서 중생성결 설교에 자극 받아 중생과 성결체험하다

김태구는 동경으로 가서 일단 하숙집을 정한 후 몇 고등보통학교(중학과정)를 알아보았으나 편입하려면 한결같이 요구하는 것이 그의 중학교 중퇴했다는 증명서류였다.

그는 할 수 없이 일단 동경예비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서 배우면서 시험을 통해 4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그는 동경에서 공부하는 동안 숙소에서 가까운 나사렛교회를 찾아갔다.

요다 도요이찌 목사는 거의 중생과 성결에 대한 설교만 하는 성결파 목사였다. 장로교회 출신인 그는 처음 듣는 설교여서 이상하게 여겼으나, 알고 보니 중생과 성결은 성경에 많이 있는 말씀이었다.

계속해서 교회에 출석하며 설교를 듣던 중 중생은 회개하므로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인데, 이 중생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오래 믿었어도 참 신자가 아니라고 말씀했다. 그는 그의 어릴 때의 믿음의 생활이 헛것이란 생각이 들자 목사에게 따지려고 찾아갔다.

요다 목사는 처음부터 그에게 “철저한 회개경험이 있느냐?”고 물었다. 김태구는 회개란 말도 중생이란 말도 이 교회에서 처음 들었다고 했더니 지난 일을 철저히 돌아보고 잘못된 것이 생각나면 하나님께 회개하라고 했다.

또 성경을 펴주면서 소리 내어 읽으라고 해서 읽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예수님 첫 설교였다. 그는 집에 돌아가면서 자기는 어려서부터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죄가 별로 없다는 생각에서 회개하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나자 갑자기 어렸을 때 못되게 구는 동네 아이를 때려준 것이 생각난 것을 시작으로 열흘 동안 매일 몇 가지씩 생각났다. 그는 겁이 덜컥 났다.

그는 다시 요다 목사를 찾아가 그가 어렸을 때 지은 죄를 눈물로 하나하나 고백하고 회개하자, 요다 목사가 회개하는 자는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 받는다는 성경을 먼저 읽고, 태구의 이름을 부르며 사죄 기도를 하는 순간 그의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며 기쁨과 평화가 찾아왔다. 그는 이때부터 속죄의 확신과 중생을 체험했다.

그때가 1940년 11월 20일이었다. 1941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준비의 해로 물자를 아껴 경제가 핍절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 교회들은 미국선교부의 지원으로 목사의 생활비를 지급했는데, 일본은 1940년 선교사들을 내쫓았기에 교회마다 유지가 어려워 폐쇄하는 교회가 늘고 있었다.

그때 한국도 그랬었다. 그가 다니던 나사렛교회도 마찬가지로 폐쇄의 위기가 왔다. 태구는 지난 3월에 고교를 졸업했으나 목사 가족을 살리기 위해 매달 부친에게서 오는 학비와 하숙비를 요다 목사 사모에게 드려 생활하게 했고, 목사의 큰방에서 함께 생활했다. 그렇게 그의 삶은 변하기 시작했다.

중생 체험 후 기쁨 속에서 사는 그에게 시험이 왔다. 요다 목사의 중학생 아들이 그에게 ‘죠센징’이라고 하면서 민족적으로 차별하는 말을 했다.

혈기가 솟아오른 그는 보복할 수도 없어 마음에 분노가 가득했다. 그는 사모를 찾아가 그의 분노를 말하자 사모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아직 혈기가 죽지 않고 원죄의 뿌리에서 해방되지 못했네.

자네가 십자가 대속의 죽임을 당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면 자네도 자아를 십자가 못 박아 죽여야 하네.” 그 말에 그는 아직 죽지 않은 자아를 발견하고 금식하며 원죄의 뿌리를 없애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며칠 후 목사 앞에서 뜨겁게 기도했다.

“주님,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나를 죽여주소서. 나를 몽땅 주의 제단에 드리오니 내 생명을 받으소서. 내 속에서 역사하는 원죄의 부패성을 완전히 제거해 주옵소서.”

눈물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순간 성령이 뜨겁게 역사하는 불세례를 받았다. 마침내 그는 성결체험을 하게 되었다. 1941년 7월 31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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