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희 장로의 순교

             이종무 목사

상부의 지령으로 자진 해산형식으로 미리 작성한 ‘해산성명서’를 발표하게 했다. 
해산성명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①장기간 미국 선교사의 지도와 재정적인 의존으로 부지불식간 영미 사상에 세뇌되어 그 잔재를 말살하기 어려웠음은 유감으로 생각된다. ②재림사상은 그리스도가 지상의 왕이 된다는 주장으로 일본국가이익에 부적합하다. ③구약성서는 유대 사상에 두어 일본 국체에 반하는 종교로서 국민종교로 성립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가혹한 고문에 굴하지 않고 순교한 분은 박봉진 김하석 목사와 정태희 장로, 김지봉 집사다. 두 분 목사는 본란에 이미 기술했다. 김지봉 집사가 신안주에서 순교한 사실이 월남한 교역자들에 의해 확인되었지만, 북녘에서 된 사건이라 상세히 알아볼 길이 없다.     

1943년 5월 24일 한국성결교회가 해산되던 오후 3시경, 군산교회 정태희 장로가 서천으로 가고자 집을 나왔다. 낯모르는 두 사람과 마주쳤다. 그들은 이 근처에 정태희라는 사람의 집을 아느냐고 물었다.

정 장로는 무심코 내가 정태희라고 했다. 그들은 경찰임을 밝히고 조사할 게 있다면서 집으로 들어가 종교 서적과 설교 원고를 압수한 후 김정호 담임목사의 행방을 대라고 했다. 당시 김정호 목사는 출타 중이었다. 경찰들은 담임목사가 돌아올 때까지 대신 정태희 장로를 군산경찰서 유치장에 감금했다. 

정태희 장로는 1910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했다. 부친이 소실을 얻어 가정을 돌보지 않아 17세의 어린 나이로 그의 모친 등 일곱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전주 익산 군산 강경 등을 전전하며 가구, 도장(페인트) 사업 등에 종사했다. 

정 장로는 1928년 18세 때 감리교에 입교하고, 강경성결교회로 이적하여 봉사했다. 그 후 군산중앙교회로 이적하여 30세에 장로가 되었다. 그는 명랑 쾌활하고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교회를 충성스럽게 봉사했다. 

교회에서 특별헌금을 할 때는 감당하기 벅찰 만큼 많은 액수를 약정하고는 날마다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하면 그때마다 뜻밖에 큰 공사를 맡게 되거나 장사 수익이 많아져 약정한 헌금을 바쳤다.

그는 다재다능하여 가구업 도장업(塗裝業) 등 여러 가지 사업을 했고, 음악적 재능도 뛰어나 여러 종류의 악기 연주에 능숙하였다. 정 장로는 교회음악과 어린이 집회 인도에 탁월한 은사가 있었다. 여러 재능을 갖춘 그는 교계의 촉망되는 인재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은사를 다 발휘하지 못하고 33세에 순교했다.     

정태희 장로가 구류된 지 일주일 후에 김정호 목사가 이리(익산)경찰서에서 연행되어 군산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정태희 장로는 나리다 형사에게 “김정호 목사님이 연행되어 들어왔으니 나를 보내주시오.” 하니, 나리다 형사는 김정호 목사와 함께 조사를 받아야 한다며 석방을 해주지 않았다. 

김정호 목사는 5월 24일 이리교회의 이진우 목사 위임식과 삼례교회의 조의현 목사 위임식 순서가 있어 행사를 마친 뒤 돌아오는 길에 삼례에서 체포되어 군산경찰서에 감금당했다. 김 목사는 다가구라(高倉)라는 일본인 형사가 담당했다.

다가구라 형사는 김정호 목사에게 우호적이었다. “목사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알아서 조서를 잘 작성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중국 요리를 사주며 마주 앉아 얘기해주며 친절하게 대했다. 알고 보니 그의 누이가 일본 홀리네스교회의 교인이었다. 그는 김 목사를 곧 석방해 줬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