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과 성장 이야기

         류재하 목사

김태구(金太九)는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1921년 7월 2일 부친 김민수와 모친 이삼막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땐 일제강점기였으나 조선 말기의 정치가문 안동 김씨의 후손으로 조상 때부터 유교를 숭상하는 천답지기 부호의 집안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거의 그의 집 토지를 소작하였기에 그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도련님’으로 불리며 자랐다.

그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6살 때부터 10살 때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느라 7살에 입학하는 보통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10살 때 마을의 상월장로교회 주일학교에 다녀 복음을 처음 만났고, 성경 찬송가를 한글로 배우고 불러 한글을 깨우치는 영리함을 보였다.  

김태구는 교회 선생님을 통해 서당보다 우리나라 한글을 배워야 나중에 일본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를 졸라서 보통학교에 가려고 승락을 받았으나 문제가 생겼다. 10살에 1학년으로 입학하면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 4학년 상급생이어서 싫었다.

이를 안 교회 목사님이 그의 집에 찾아가 아버지에게 태구의 공부를 위해 큰 도시 학교에 가서 배워야 한다고 설득하여 친척이 사는 목포에 가서 목포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에 1학년에 입학하려고 하자, 남달리 키가 큰 그를 보고 학교의 배려로 나이에 맞는 4학년으로 입학시켰다.

그는 부친을 닮아 키가 크고 덩치가 있어 한 두 살 많은 아이들도 그를 두려워했다. 머리가 명석한 그는 배우는 데도 열심이 있어 한글은 물론 나중엔 국어로 가르친 일본어도 금방 배워 반에서 우등생이었고, 1934년에 보통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목포에서 가장 명문인 목포고등상업학교에 진학하여 앞으로 재벌이 될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가 남보다 키가 크고 힘이 있어 보여 학교에서 강제로 유도부에서 활동케 했고, 그는 건강을 위해 체육 기술은 하나 있어야 한다며 공부 끝나면 유도부에 가서 낙법부터 배우고 부원끼리 대결하는 등 훈련에 힘쓴 결과 그가 4학년 때는 그를 당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유도부 코치 일본인 선생에 의해 졸업한 선배의 뒤를 이어 유도부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유도부 주장으로 코치의 가르침에 따라 부원들을 열심히 지도했다. 어느 날 일본인 학생이 그에게 주장 자리를 빼앗긴 분풀이로 태구의 지도를 따르지 않고 거부하며 그에게 “조센징이 힘 있으면 뭐해? 머리는 돌덩이인데”하고 민족 차별적인 말을 했다. 일본인들은 식민지 대한인을 아주 깔보는 말로 ‘조센징’이라고 불렀다.

이 말에 모욕감을 참지 못한 태구는 그의 유도복을 붙잡는 순간 단번에 때려 눕혔다. 얼마나 강하게 분노의 힘을 보였던지 일본인 학생은 낙법을 할 사이도 없이 허리를 크게 다쳐 긴급 병원으로 실려 갔다. 이 사건으로 태구는 일본인을 구타했다는 죄명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갑질이었다.

한 동안 학교에 가지 못해서 자기 행동을 후회도 했으나 나중에는 민족적 설음 때문인 줄 알고, 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는 기도 중에 깨달음이 왔다. 그것은 한문에서 배운 손자병법 ‘적을 알면 백전 백승한다’는 말이 생각 난 것이다.

일본을 이겨 우리가 독립하려면 우선 일본의 장단점을 알기 위해 일본에 가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는 즉시 고향집에 가서 학교 사건을 말하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일본에 유학가기로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법관이 되길 원했으나 아들을 믿었다. 대지주를 물려받을 장남인데 다른 부잣집 아들처럼 버릇없거나 방탕하지 않고, 심성이 착하고 매사에 신중하고 영특해서 자기 일은 자기가 할 수 있도록 그를 믿었다. 그는 목포항에서 일본 가는 배를 타고 떠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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