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목사의 꿈

류재하 목사
안수훈(安秀勳)은 황해도 황주에서 1924년 4월 6일에 부친 안병촌과 모친 박관문 사이에서 10남매(5남 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때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된 강점기였다.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조선인들을 학살한 일제는 세계 여론의 비난으로, 1920년에 유화정책을 폈다.

그것은 신문과 잡지 발행을 허가함과 동시에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위해 각 면마다 공립 소학교를 건립하였는데, 그의 고향 영풍면에도 영풍소학교가 설립된다.

그의 부친은 일본을 싫어했으나 소학교에서 한글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소학교에 입학시킨다. 그는 4학년 때, 친구의 전도로 마을 긴골장로교회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안수훈은 교회에서 성경을 배우면서 민족의식에 차츰 눈을 뜬다. 특히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 받아, 애굽의 노예로 고통받는 동족을 이끌고 탈출하여 자유를 찾는 이야기는 어린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는 모세처럼 되기 위해 목사가 되어야 한다며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구원해 주세요. 저를 목사가 꼭 되도록 인도하시고, 모세처럼 사용하여 주세요.”

1937년에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황주양성학교(중학)에 진학하여 열심히 공부하였다. 또 신앙을 위해 모든 예배에 참석하였고, 목사님의 시사성 있는 설교에 큰 깨달음을 받는다. 설교에서 “세계 역사를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라는 말씀이 마음을 울렸다. 1942년 봄에 그는 황주양성학교 5년제를 졸업하고, 불안한 시국 때문에 당분간 집에서 농사를 돕고 관망했다.

1941년 12월에 일제는 미국을 폭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일제는 군인을 보충하기 위해 조선 청년들을 징집하거나 마을을 다니며 청년들을 붙잡아 강제로 전장에 보냈다. 그는 골방에 숨어 신구약 성경을 여러 번 통독했고, 또한 기도를 통해 그의 신앙이 더욱 성장하였다.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이 찾아왔다. 해방되던 그날 오후에 마을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우렁차게 부르며 마을을 행진하는 소리에 그는 놀라서 골방에서 나왔다.

그 해 9월에 남한엔 미군이, 북한엔 소련군이 해방군으로 각각 진주했다. 미국은 민주주의와 기독교 국가여서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북한의 소련군은 김일성이란 30대 소련군 대위를 앞세워 ‘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교회나 단체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에 그는 평양에 가서 감리교의 성화신학교에 입학했으나 1946년 2월에 김일성은 북한에 ‘토지개혁’ 으로 골고루 토지를 나눠준다며 개인의 토지를 모두 빼앗아 농민들에게 13%만 나눠주고, 87%는 공산당 간부들이 독차지했다. 그의 가정은 모든 토지를 빼앗겨, 공산당 간부의 토지를 빌려 농사짓는 소작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허울 좋은 토지개혁의 실상이다.

김일성은 ‘조선기독교연맹’을 조직하고, 일부러 주일 아침마다 근로동원령을 내려 교회에 가느라 오지 않으면 ‘반동’이라고 처벌했다. 그래서 교회마다 신자들이 반으로 줄고, 참 신자들은 신앙자유를 찾아 봇짐을 매고 38선을 넘어 탈출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성화신학교도 폐교시키자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장래를 위해 기도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탈북하여 월남할 것을 결단한다. 1946년 9월 초에 집을 떠나 백여리를 걸어 38선 경계마다 지키는 소련군들을 피해 밤중에 산길로 38선을 넘어 옷이 땀에 젖도록 걷고 또 걸어 이른 새벽에 개성에 도착했다. 그땐 개성의 2/3가 남한 땅이어서 서울로 가면서 문전걸식, 잠은 헛간에서 자고 사흘 만에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에 들어서자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크게 외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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