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 베다니교회와 대한인교회 목회

        류재하 목사
        류재하 목사

안수훈 목사는 미국에 아직 한인성결교회가 없어, 그가 한인성결교회를 세워 4중복음을 전 세계로 전파하는 전초기지를 삼으려고 기도했다.  

어느새 그의 자녀들이 5남매로 7식구가 되었고, 나이 43세였다. 마침내 그는 1967년 5월 21일 오전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큰 꿈을 향해 한국을 떠났다. 

안목사가 LA에 도착하여 공항 밖으로 나오니 송박사가 보낸 홍창호 집사 내외가 그를 맞았다. 안 목사는 홍 집사의 아파트에 가서 유숙했다. 그러나 그가 부임할 ‘대한인기독교회’ 목사가 전임을 약속했는데, 전임할  교회에 사정이 생겨 떠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장로교 김학철 목사가 당분간 자기 교회 목회를 요청하여 베다니교회로 일단 부임했다.

그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영주권 문제인데, 김학철 목사가 미국 복음교회의 총회장 Stward 목사에게 부탁하여 이민국에 안 목사의 영주권을 신청해 주었는데,  2개월 만에 영주권이 나왔다.

그는 영주권을 받자, 즉시 서울에 있는 아내에게 영주권 받았다는 소식과 함께 가족이민 초청의 서류를 발송했다. 그래서 1968년 1월에야 가족이 LA로 이민을 올 수 있었다. 

얼마 후 ‘대한인교회’ 목사가 다른 교회로 옮겨 가자 그는 베다니교회를 떠나 ‘대한인교회’의 목사로 부임했다. ‘대한인교회’는 이승만 박사가 독립운동을 할 때 그를 돕는 회원들이 힘을 합해 세운 독립교회로 1936년에 LA에 세웠다.

안수훈 목사가 부임할 때까지 개인주택을 수리하여 교회로 사용했는데 매우 협소해서 미국인 안식일교회를 임대하여 주일 11시에 예배드렸다. 

그러나 1970년 여름에 성가대 지휘자가 여성문제에 휘말리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안 목사는 직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의 해임을 건의했지만,  지휘자를 송박사 가족이 한국에서 초청하였기 때문에 인정상 해임할 수 없다고 했다.

안 목사는 직원들의 뜻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자신이 사임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주일부터 집에서 가족끼리 예배 드렸는데, 홍창호 집사와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집사들 5, 6명이 함께 했다.

안 목사는 그들에게, 성경의 말씀대로 사는 참교회가 이 시대에 필요하다고 역설하자, 젊은 집사들은 안 목사의 뜻에 적극 공감했다. 안 목사는 이들을 중심으로 그동안 꿈꾸어  온 성결교회를 개척할 기회라면서 기도했다. 그 때가 1970년 10월 하순이었다.

1970년 11월 7일. 이 날 주일을 기해 나성성결교회가 창립되었다. 비록  안 목사의 집 리빙 룸에서 드린 초라한 창립예배였지만, 안 목사는  감격스러움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날 모인 수는 홍창호 집사를 비롯한 청장년 18명과 어린이 5명 등 모두 23명이었다.

안 목사는 강대상 대신 재봉틀 위에 성경을 펴 놓고 예배를 인도하며 감격에 찬 설교를 했다. 그의 설교 요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결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면서, 신자들에게 처음부터 성결교회의 이미지를 심기에 노력했다. 

교회 창립 2개월 만에, 신자들이 늘어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려웠다. 안 목사는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일본인교회 목사를 만나 일본 말로 교섭한 결과 쉽게 허락 받았다.

안 목사와 나성교회 신자들은 1971년 1월 첫 주일부터 일본인교회로 들어가서 예배 드렸다. 교회당의 좌석도 20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아담한 교회였으나 일본인들 예배 후, 오후 1시에 드려야하는 것이 불편했다.

나성성결교회는 점차 주변에서 알아주는 교회가 되어 갔고, 안 목사는 이민 오는 사람들의 편의를 잘 돌봐주고 설교도 잘 한다는 소식이 LA 일대에 퍼졌다. 그래서 매 주일마다 새 신자들이 찾아와 등록함으로 교회는 나날이 부흥되었다. 1972년에는 신자 수가 118명으로 증가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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