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의 수난

             이종무 목사
             이종무 목사

태평양전쟁 중 한국성결교회는 재림 신앙 때문에 일본의 박해를 받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단이다.

일본은 재림 신앙이 일본의 국가체제와 대립 된다고 인식했다. 
일본의 성결교회 박해는 일본의 홀리네스(성결)교단부터 시작되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국체명징(國體明徵), 인고단련(忍苦鍛鍊)의 국민운동을 결정했다.

국체명징은 나라의 본질을 증거로써 명확히 한다는 것으로 나라의 본질은 천황에게 있으니 천황에게 절대 충성하자는 운동이다.

인고단련은 괴로움을 참고 몸을 튼튼히 한다는 뜻으로 지금 전쟁이 일어났으니 몸이 아프고 고달프지만 괴로움을 참고 견뎌 단련하여 일본제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하자는 운동이다. 

일본은 1941년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 한 후 12월 7일 새벽에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함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주동세력인 일본군부는 전쟁의 명분으로 동양평화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동양의 평화 파괴행위였다.

태평양전쟁으로 동남아경제가 파탄되고 1900만명이 희생되었다. 난징학살(100만명), 일본군 731부대가 조선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에 대한 잔혹한 생체실험 학살을 하는 등 동남아 각국에서 만행을 자행했다. 

또한 그들은 한국독립운동가를 적발 처단하고, 애국지사를 예비검거하여 고문을 가했다. 민족자본의 성장을 억제하고, 광산물 산지와 어장을 약탈해 경제적 지배기반을 마련했다.

토지조사사업의 역점으로 소유권을 박탈하여 전국토지 40%를 약탈했다. 동양척식회사가 한국인 소작농 상대로 일본인이 지주가 되어 한국 쌀을 싸게 매입하여 일본의 식량을 보충했다.

이로 인해 한민족생활의 극심한 궁핍화를 가져왔다. 강제징병제, 학병제도, 국민의용대 등을 편성하여 패전위기 경비태세를 강화하고 여자정신대 근로령공표, 배급제로 생활을 압박하여 희생제물로 삼았다. 

또 일본은 재림과 부활에 대해 히로히또(昭和 天皇)를 현신인(現神人)으로 주장하여 일본 천황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래에 있다고 하는 것은 천황을 모독하는 처사이며 부활은 미신이기 때문에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1942년 6월에 일본의 홀리네스교단과 구세군의 모든 교역자 140명을 검거했다. 재림의 교리가 일본의 국체에 반대된다는 것과 일본 주도로 조직 개편한 ‘일본기독단’에 비협력한 것이 그 이유였다. 

구세군교회는 영국과 내통한 첩자라고 하여 해산시켰다. 당시 일본의 홀리네스와 구세군은 태평양전쟁이 예수의 재림을 고대하는 대환난으로 알고 재림을 열열하게 고대하면서 회개운동을 했다. 일본홀리네스 교회에서 시온회라는 조직이 있었고, 일본은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혈서를 쓴 목사도 있었다.

마땅히 일본 천황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아야 하니 회개하라고 저항하는 자도 있었다. 1937년 야나이하라 동경대학 교수는 ‘하나님 나라’ 주제의 강연에서 “일본 나라여, 죽으라, 죽는 것만이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다.” 한 것이 문제 되어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일본 성결 계통 교단에 대해 종교단체법 16조에 근거하여 설립인가 취소를 내렸고 내무성은 치안경찰법 제8조에 의해 결사 금지 처분을 내렸다. 1940년 가가와(賀川豊彦)는 마쓰바라교회에서 전한 ‘예레미야 애가를 배우며’라는 설교로 반전운동가로 몰려 체포되었고, 무교회의 창시자 우찌무라(內村鑑三)는 명치천황사진에 대해 최대경례(90도 이상)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경죄로 동경대학에서 쫓겨났다. 우찌무라는 조선 침략도 러일전쟁도 반대했던 이력으로 경찰의 감시대상이었다. 

일본은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40세 이상 목회자 203명을 군수공장에 강제동원하여 노동력을 착취했다. 미군공군의 폭격으로 482개 교회와 331명 목회자가 재난을 당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되어 일시에 14만, 8월 9일 나가사끼에 7만 명이 희생되니 현신이라던 히로히또도 별 수 없이 무모함을 느끼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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