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공산권 여행과 44년 만에 북한 고향 방문

       류재하 목사
       류재하 목사

1989년 6월 어느 날 안수훈 목사와 임동선, 이기홍 목사와 장로교, 침례교 등 10여명으로 구성된 유럽공산권의 선교가능성 타진을 위한 여행단이 LA공항을 출발했다. 미국시민인 그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비자를 받아 공산권 종주국인 소련의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최고의 호텔이라는 숙소는 미국의 삼류호텔보다 못했고, 식사도 형편없었다. 

그들은 소련 위성국인 우즈베키스탄, 카잔스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에 가서 둘러보았지만, 그곳들은 모스크바보다 더 형편없었다. 안 목사 일행은 귀국 길에 동독과 서독을 거쳐 LA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여행을 통해 공산세계는 얼마가지 못해 망할 것 같은 예감에 계속 기도했다. 

마침내 그 해 11월에 동독과 서독을 가로막은 담이 허물어지면서 동독이 서독에 합류되었고, 그 여파로 유럽의 공산권 국가들이 자유를 선택하여 각국에 주둔한 소련군이 철수했다.

이듬해에는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 고르바초프 수상은 공산당 해체를 선언하고, 소련에서 옛 이름인 러시아로 개명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안 목사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자나 깨나 잊지 못한 것은 북한에 두고 온 부모님과 동생들이었다. 고향 방문을 위해 기도하던 중, 1990년 3월에 여행 허가를 받아 LA공항에서 중국 북경으로 갔다가 북한대사관의 비자를 받아 북한으로 갔다.

평양에서 무거운 가방 5개를 끌고 기차에 올라, 황해도 황주 고향 땅에 도착하자, 그에게 감시원이 따라붙어 말도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안 목사는 고향 마을에서 여동생들과 남동생을 만났다. 모두들 결혼했으나 몹시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그는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 묘소에 동생들과 함께 올라가서 묘소 앞에 무릎을 꿇고 장남으로서의 불효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는 저녁식사 후 가지고 간 다섯 개의 가방을 모두 풀자, 동생들과 친척들이 와서 자기들끼리 모두 나누어 가졌다. 하루 밤을 동생 집에서 자면서 가지고 간 성경책을 주었더니 집에 성경책 있으면 잡혀간다며 거절했다.

가족에게 조차 전도하는 것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는 고향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며, 속히 북한이 신앙생활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1995년 11월 첫주일에 나성교회는 창립 25주년 기념과 함께 안수훈 원로목사 추대식을 거행했다. 한국에서 목회생활 16년, 미국에서 초교파 목회생활 4년, 그리고 나성성결교회를 개척하여 성장시킨 25년까지 그의 목회생활은 총 45년, 거의 반세기였다. 

이날 많은 신자들과 지방회와 미주총회 인사들, 그리고 초교파적 인사 등 그의 명예로운 은퇴를 축하하는 분들이 많이 참석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로 45년의 목회생활을 축하했다. 그는 반세기에 이르는 목회생활을  마감하는 날, 답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심경을 표했다. 

그는 “부족한 사람을 목사로 세워, 평생 목양의 길로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고 했다.

또한 “나성교회보다 후에 설립한 교회가 나성교회보다 더 큰 교회로 성장한 것을 보면서, 나의 목회가 실패하지 않았는지 회의가 들때도 있었으나 하나님께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최선을 다한 목회에 후회가 없으며,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다시 목사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답사에 나성교회의 성도들과 동료 목회들이 감회의 눈물을 흘렸다. 

미주성결교회의 아버지!’ 그는 은퇴 후 주님이 계신 하늘나라에 유일한 소망을 두고 조금씩 영과 육을 더욱 다듬어 가며 기도에 힘쓰다 마침내 2016년 6월 30일 하늘 아버지의 부르심을 받아 평생 영혼구원을 위해 역동적으로 헌신한 영혼이 하늘 아버지의 품에서 영원히 안식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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