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비 교회건축비로, 자녀손 목사 7명의 신앙가문 이루다

기도로 암을 이긴 조 권사는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도하며 쉴 새 없이 다녔다.

그뿐 아니라 군부대까지 위문하고 전도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해 예수님을 영접한 군 장병들이 주일이면 20∼30명씩 만현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등 교회가 크게 부흥되자 30평 교회는 비좁아 50평으로 확장, 다시 교회를 신축하게 되었다. 새벽마다 두세 시가 되면 기도하러 나갔고 새벽종까지 치면서 교회 부흥에 앞장섰다. 

조광녀 권사가 수술비 전액을 건축헌금으로 드리자 1978년 11월 7일 기공예배가 시작되었다. 회갑 때 받은 금비녀, 금팔지, 금목걸이, 금반지 등 금이란 금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바치고 교회가 완성될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 교회가 확장되니 교회는 더욱 부흥되어 갔다. 

1980년 10월 교회가 완공되자 조 권사의 헌신을 본 담임 김세한 목사는 감동을 받아 장로교회를 탈퇴하고, 교회 이름도 해안성결교회로 개명하고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 가입한 후, 해안성결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조광녀 권사와 영혼 구원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장남 박영재 장로 내외는 양구 중앙시장에서 포목점과 기성복까지 겸하여 사업을 크게 했기에 매우 바쁘게 일했다. 둘째 영석이는 단국대 법대를 졸업하고 양구군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국회의원에 야당으로 출마했지만 여당성이 강한 양구에서 계속 낙선하자 정치에 뜻을 접고 양구 해안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내외가 주의 일에 힘쓰고 있다.

큰 자부 이금례 권사는 11세부터 키운 시동생이기에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모든 경비를 뒷바라지 하느라 장사가 거덜이나 남편과 같이 보따리 장사로 나서야 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박영재 장로는 부동산 공부하여 부동산 사무실을 차려 운영하면서 연세대학교 문화원에서 2년간 문학공부를 해 시인으로 등단, 시집을 4권 냈다.

이금례 권사는 홀시어머니를 53년간 정성껏 모신 효성이 지극한 자부로 1953년 5월 8일 양구 임경순 군수로부터 효부상을 받았다. 집에 찾아오는 사람마다 누구나 식사를 대접하고 여비봉투를 쥐어주었고 담임목사 생일 때는 매년 잔칫상을 차려 대접했다. 

셋째 영조는 일찍이 영농에 뜻을 두고 조치원으로 내려가 성실히 일한 결과 부농의 꿈을 이뤄 내외가 집사, 권사로 주님을 섬기고 있으며, 넷째 영률은 “너는 목사가 되어 주님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어머니 말씀대로 목사가 되어 한마음 교회를 세워 목회하면서 CCC(한국대학생선교회) 총무로 ‘74엑스포’를 성공리에 마쳤으며, 한기총 제5대 총무를 역임한 시인이다.

장남 박영재 장로 큰 아들 창섭은 농수산물연구소에 근무하는 교회 집사로, 아내 김복선 권사와 같이 해안성결교회의 충실한 일꾼으로 섬기고 있고, 장녀 명숙은 어머니가 “너는 모태에서 하나님이 내 종이다”라고 말씀하신대로 이상호 경찰과 결혼한 후, 목사가 되어 충북 소서교회에서 섬기고 있으며, 차남 창섭은 화천한신성결교회 담임목사로 사역 중이다.

2녀 성숙은 서울에서 이명재 고교 교사를 교회에서 만나 결혼했는데, 이금례 권사가 병문안 온 사위에게 “앞으로 자네가 갈 길은 목회의 길이네”라는 뜻밖의 말씀에 10년 작정 기도 중 7년 만에 응답을 받아 목사가 되어 김천 덕천교회에서 부부 목사로 섬기고 있고,  3녀 지숙은 서울신대원을 나온 전도사로 조성훈 목사와 결혼하여 현재 대천침례교회 담임목사부부로 사역하고 있다.

자녀 손들이 조광녀 권사의 신앙으로 7명이 목사이고, 두 증손자가 현재 신학교 재학 중이어서 앞으로 계속 목회자가 배출될 것이다. 조광녀 권사는 갖은 역경을 딛고 일어나 신앙의 가문을 이룬 믿음의 여장부로, 1998년 10월 하나님 부르심을 받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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