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결교회에 대한 박해

일제는 1941년 최헌 목사가 군위지역 부흥회에서 한 설교를 문제 삼았다. 고등계 김수암 순사가 군위 성동교회를 수색해 독립사상의 노래로 분류된 금수강산, 에덴동산, 아이들의 임금은 누구뇨 등 노래를 부른 혐의로 최헌 목사와 은희천, 정영식 장로와 교사들을 구속했다. 이들은 가죽끈으로 난타당해 전신에 시퍼렇게 멍이 드는 등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금화성결교회 신자 한정우는 “독일과 일본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마지막 승리는 결국 그리스도다. 일본 천황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숭경존모(崇敬尊慕)하지 않으면 심판받는다”는 언동을 한 이유로 징역 1년을 살았다. 

이성봉 목사는 탄압이 극심해 만주에 정착하면서 계속 한국에 와서 부흥회를 인도했다. 이 목사는 부흥회에서 자연계의 징조를 보든지, 국제와 사회 징조를 보든지, 교회 상태를 보든지 주의 재림이 가까웠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민족이 다 망한다고 설교했다. 

송세영 장로가 그 설교를 기록한 노트를 가지고 사리원 부흥회 참석하러 가다가 기독교를 혐오하는 일본인 호시 형사부장에게 잡혔다. “이 설교 누구에게 들었나?” “이성봉 목사에게 들었소.” “그 목사가 지금 어디 있나?” “사리원감리교회 집회 중이요.” 이성봉 목사가 사리원경찰서에 검속되었다. 일본인들은 이 목사와 송 장로를 발가벗긴 채 30일간 차가운 마룻바닥에 재우며 온갖 모독을 주었다. 

당시 부흥회에 참석했던 사람도 모두 연행해 유치장이 좁아서 여관에서 심문했다. 
심문하던 호시 부장은 검사국으로 넘긴 후 발진티푸스가 발병해 고열로 정신 잃고 “아이고 예수쟁이, 아이고 예수쟁이” 하며 발광하다가 죽었다.

호시 부장을 대신 해 일하던 경찰도 죽고. 5일 후엔 경찰서장도 죽었다. 이 목사와 송 장로는 그들의 영혼이 불쌍해서 울고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공의로 심판하심을 체험했기에 감사해 울었다. 이것은 성결교회의 재림교리가 신자의 심령 깊이 각인되었음을 뜻한다. 

경찰의 조서 내용은 ①현 시국을 말세라 주장해 일본 패망을 강조하고 ②신사참배를 우상으로 주장해 일본 정책을 반대하고 ③지상천국을 강조해 일본 패망을 주장하며 ④말세 주장은 영원토록 존속하는 만세일계(万世一系),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천황 제도를 거역했다는 것이다.

팔굉일우(八紘一宇)는 세계가 하나의 집으로서 세계만방이 천황의 지배 아래 있다는 이념으로서 황국사관의 근본 사상으로 일본 천황을 위한 세계정복 야욕의 의미다. 

박해가 성결교회 전체 규모로 진행되었다. 1940년 주한선교부가 철수하고, 1942년 ‘활천’지가 폐간됐다. 이어 1943년 경성신학교가 폐교되고 12월 29일에는 한국성결교회가 해산당했다. 

성결교회 본부의 간부들은 서대문경찰서에 검사 구류로 심문을 받았다. 주로 신앙, 사상, 교리 분야를 30여 항목으로 나눠 8개월간 가혹하게 문초했다. 주로 창조론, 신관, 신사참배, 재림, 종말론, 이스라엘 건국 문제를 심문했다.

그들은 재림사상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해 천황의 신성을 모독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일본제국을 무시하고, 이스라엘 회복의 주장은 일본에 반하는 시온주의라며 탄압했다. 

결국 성결교회는 1943년 9월 예배 중지를 당했다. 12월 조서가 완료되자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돼 있던 성결교회 지도자들은 수갑을 차고 검사 앞에 서게 되었다. 일본의 역사를 부정하고, 국가체제를 반대하고, 천황제도를 파괴하는 단체로 판결했다.

한국성결교회의 건물과 땅은 피복공장, 제빵공장, 개인, 동양척식회사, 조선신탁회사 등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매각한 재정은 교역자에게 나눠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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