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우 목사 만나 서울신학교 편입

류재하 목사
일가친척 하나도 없는 서울에서 그는 뜻밖에 체부동성결교회 한명우 목사를 만난다. 그의 딱한 형편을 안 한 목사는 그의 사택에서 숙식하도록 했다. 그는 월남직전 담임목사에게  중앙신학교를 소개 받았기에 중앙신학교를 찾아갔다. 그는 성화신학교 1년 경력을 인정받아 신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당시 신학교는 3년제였다. 그는 한명우 목사의 소개로 돈암동교회 전도사로 일했다.

그는 1949년 5월 초교파인 중앙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고민하다 한명우 목사의 권면에  중앙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성결교회 신자가 된다. 그는 서울신학교에서 열정적인 신앙과 선교정신을 배운 후. 평생토록 성결교회 성직자의 길을 가기로 확정하고 기도와 신학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새 조국을 갖는 감격에 평생토록 대한민국을 사랑하리라 굳게 다짐하고 기도했다. 

당시 서울신학교 학제는 3년제로 그는 학교의 전통인 신학생 수련회에서 큰 은혜를 받는다.  강사는 미국인 신학박사여서 통역설교를 했는데. 시간마다 중생과 성결을 강조하고 회개를 촉구했다. 강사의 외침에 신학생들이 회개하는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그는 처음에 냉랭하던 가슴이, 은혜의 열기 속에서 자기도 모른 회개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는 착실한 소년이었으나 성령의 역사로 회개가 터지니 잊어버린 잘못들이 계속 터져 나와 오랫동안 회개하느라 눈물과 콧물을 수건으로 닦고 나니, 구원의 확신과 마음에 평화로움이 찾아와 얼마나 기쁜지, 비로소 중생을 체험하였다.

1950년 5월 23일 서울신학교 제9회 졸업식이 학교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이제 나는 주님의 종이 되었다. 내 평생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하고 굳게 결심했다. 그리고 이제는 돈암동교회의 정식 전도사가 되어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6월 25일 주일이었다. 주일 낮 예배를 마치자 청년들이 뛰어오며 소리쳤다. “큰일 났습니다. 공산군들이 쳐들어 왔답니다!”

그는 한명우 목사 댁에 가서 라디오를 틀자, 남자 아나운서의 흥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국민 여러분. 오늘 새벽 4시를 기해, 이북 공산군이 38선 전역에서 불법으로 남침했습니다.”

이렇게 한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서울역은 피난민들로 아우성이었다. 그는 하루에 몇 번 없는 남행열차를 타기 위해  한나절 기다렸다가 한 밤중에 떠나는 기차를 겨우 매달려 타고, 대전에 갔다가  대전교회 김창근 목사를 따라 대구로 내려갔다. 

낙동강 남쪽에 있는 대구는 국군총사령부가 있고, 그곳까지 내려 온 적을 사력을 다해 방어하느라 낙동강은 밤낮없이 계속되는 전투로 핏물이 흐르는 강이 되었다. 임시 수도는 부산으로 내려갔는데 9월 초에 부산에서 대구로 온 어느 목사가 그에게 새 소식을 전했다.

육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비공식 군목을 모집한다는 것이다. 그는 군에서 전도를 하면 이북의 가족들도 만날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고, 제1기생으로 지원했다.

부산과 대구에서 예비군목에 지원한 50여 명의 교역자들은 대구 근교 훈련소에서 4주 동안 약식 훈련을 받은 후, 각 부대에 파송되었다. 그들은 훈련 중인 9월 28일에 아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다.

당시 국방부 편제에는 군목제도가 없어 각 부대에 파송한 그들에게 군복만 지급할 뿐 계급 없는 무보수 촉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우보다는 사명감이 더욱 중요하므로 조금도 불만이 없었다. 마침내 1951년에 예비군목- 촉탁- 문관에서, 1954년 말에 군종장교로 제도화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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