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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영화중학교는 1948년 교단에서 인수하여 운영한 미션학교다. 총회유지재단에서는 8장 29조의 학칙을 정하고 최석모 황경찬 이종문 김유연 박형규 박현명 목사를 인천영화중학교 이사로, 김기삼 목사를 교장으로 선임하여 재단완성을 추진했다. 인수할 당시 인천영화중학교는 1.2학년 주간 5학급, 야간 2학급, 학생 400 명, 교직원 17명, 15개 교실과 사무실 강당 주택4동 운동장 3천 평의 규모였다. 1955년에는 학생 813명으로 확장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이헌용 목사가 인천 백석마을에 영화중학교 분교로 성문중학교를 설립했다.6.25한국전쟁 이후 서구 자선기관의 원조로 사회복지사업과 전후복구사업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미션학교들이 설립되었다. 가장 오래된 성결교회의 미션학교는 균명학교다. 설립자 김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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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19.09.2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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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15 조국광복과 함께 교단이 재건되면서 신학교육재개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9월 2일 주일에 드린 재흥예배에서 모아진 5,000원의 헌금으로 신학교 강당을 새롭게 수리했다. 11월 9일에 열린 재흥총회에서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던 경성신학교 개교를 결의하고 교장에 이건 목사를 선임했다. 그 해 11월 20일 재학생 56명으로 신학교육을 재개했다. 1946년 6월 25일 문교부의 정식인가를 받았다. 신학교가 막상 문을 열었으나 재정이 열악해 운영상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때 동양선교회도 국내로 복귀하지 않은 시기라 자립해야 하는 상황에서 경성신학교 유지회를 조직하고 박형규 목사를 유지회 총무로 선임했다. 신학교 개교를 결의했으나 당장 재정형편이 어려워 운영에 차질이 발생했다. 그러던 중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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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
2019.08.2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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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북한지역과 만주지역을 순회 전도하던 이성봉 목사가 북한과 만주의 각 교회를 순회하면서 교회재건을 주도하여 북한과 만주에 산재해 있던 교회들이 조속히 재건되었다. 함북지방회 소속 회령교회, 청진교회, 신암동교회, 포항교회, 운영동교회, 나진교회, 웅기교회, 나남교회, 서수라교회, 성진교회(10교회)와, 함남지방회 소속 함흥북부정교회, 산수정교회, 흥남교회, 영흥교회, 고원교회, 신북청교회, 북청교회, 여포리교회, 원산교회(9개 교회) 그리고, 서부지방회에 소속한 신의주서부교회, 의주교회, 양시교회, 비현교회, 평양상수리교회, 암정교회, 기림리교회, 신안주교회, 진남포교회, 진지동교회(10교회)와 황해도지역의 사리원교회, 신천교회, 문화교회, 북율교회, 해주교회(5교회)에 이어 경기도지역의 개성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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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19.08.2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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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일제치하에서 36년이라는 기나긴 수난의 세월을 보내고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의 놀라운 감격을 체험했다. 이는 국권회복이라는 민족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잃어버린 신앙의 자유를 회복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이후 미군정 3년의 기간을 거쳐 1948년에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국가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도 보다 나은 교육을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나 1950년의 6.25 한국전쟁으로 교회와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휴전과 함께 복구를 위한 노력을 하며 곤경의 자리에서 일어서는 몸부림이 있었다. 8?15 해방을 맞은 한국교회는 일제의 사슬에서 신앙적 교회를 재건하려는 명망 속에서 출발했다. 일제 치하에서 친일에 앞장섰던 일부 교권주의자들의 반발과 6?25사변 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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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19.08.1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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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배 집사는 율암리에 돌아와 하저리교회로 나가면서 방 한 칸을 얻어 겨우 살게 되었다. 여섯 식구 밥이라도 굶지 않으려고 온갖 일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셋째 성숙이가 감기를 앓더니 폐렴으로 돌아 숨쉬기도 힘들어 했다.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가고 한의원에 가서 겨우 약 몇 첩을 가져와 먹기도 전, 엄마 약, 엄마 밥 하던 어린 네 살배기, 한약 한 방울 입에 넣지 못하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 기침을 하더니 숨이 차 꽃망울로 떨어져 버렸다. 못 먹이고 못 입힌 아이를 잃고도 슬픔 속에서 열심히 기도하던 중 방언을 받아 방언기도가 시작되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담임 송 목사가 부르더니 방언 기도를 저지했다. 피와 땀을 쏟았던 정든 교회에서 기도마저 할 수 없어서 서글퍼 산으로 올라 기도를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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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성결문화선교회)
2019.08.07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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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배는 새로운 사업을 하기 위해 논밭을 다 팔아 사업자금을 만들기로 했다. 바로 밑에 동생 충신이는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새 어머니가 낳은 남동생 역시 고등학생이므로 새 어머니는 “막내아들 공부만은 어떻게 해서라도 시키고 싶다. 바다에 나가 해산물이라도 해서 돈을 마련하겠다”라며 집에 그대로 사시고, 아버지와 그 동안에 낳은 큰 딸 명숙이와 아들 종현이를 데리고 다섯 식구가 전북 순창으로 내려갔다. 곧 공장부지를 매입하고 한지공장을 차렸다. 처음에는 공장이 제법 잘 되었다. 그러나 강화유리가 새로 나오면서 종이보다 유리를 선호하게 되어 사업은 생각대로 잘 되지 않고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지는 이미 한물가고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뛰어 들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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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성결문화선교회)
2019.07.1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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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정배는 너무 일찍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의 뜻을 안 아버지가 휴가 나온 아들을 앉혀 놓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율암리에서 다닌 열 명의 처자들 있지? 눈여겨보니 그 중에 조신하고 예의바르고 인물좋은 처자가 있더라. 나는 그 처자를 꼭 내 며느리로 삼고 싶다. 너와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자칫 잘못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갈 것 아닌가?라는 조바심마저 든다. 네가 휴가 나왔으니 어떻게 해서라도 약혼이라도 해두고 싶다. 내가 직접 말하지 않고 김 집사에게 이미 중매 서 줄 것을 부탁 해 두었다”고 하였다.정배는 그녀를 만나서 오히려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의지를 꺾을 수 없어 고민을 하다가 아버지의 연세도 있기에 아버지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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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성결문화선교회)
2019.07.1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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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은혜로 병 고침을 받고 나니 신앙은 나날이 성장했다. 이젠 건장한 청년으로 교회의 모든 일에 앞장서서 일했다. 어떤 일을 하던지 재미가 있었고 기쁨이 넘쳐났다. 성도들은 병을 고치고 귀신이 나가는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김창순 여전도사님도 정배 청년이 깨끗이 치료되고 큰 일꾼이 되는 것을 보고 아주 기뻐했는데, 그 후 하저리 뿐 아니라 율암리에서도 총각 처녀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청년들이 많이 몰려드니 교회는 생기가 넘쳐났고, 박정배를 중심으로 청년들의 힘으로 교회를 건축했다. 그러나 정배는 하나님을 위해 살기 위해서 공부만큼은 계속해야 했기에 수원에 있는 고려 영수학원을 다니면서 수료했고, 또한 고등성경학원을 졸업했다.어느 여름 날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 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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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성결문화선교회)
2019.07.03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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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배 목사(1934∼2008년)는 화성군 석포리에서 박길용씨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석포리는 마을 앞에 끝없이 펼쳐지는 서해바다가 넘실거렸고, 뒤로는 아름다운 야산 아래 50여 가구가 옹기종기 어우러져 정답게 살고 있었다. 당시는 일본 식민지로 너나없이 설움을 당하며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석포리 마을 사람들은 시간만 나면 바다로 나갔다. 게를 잡고 해산물 이것저것을 건져와 시장에 팔기도 했는데, 농사를 지었기에 그렇게 궁색하지는 않았다. 정배의 가정도 아버지는 공장을 다닌 직장인으로 출 퇴근하면서 한편으로는 논밭을 경작했기에 그런대로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한 가지 설움이라면 어린 정배는 또래 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가는 것을 보면서 “나도 우리 엄마가 살아 있다면 엄마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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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성결문화선교회)
2019.06.12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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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균 목사는 부산교회로 전임하였다. 총회장을 역임한 분으로 대전의 큰 교회를 그만 두고 부산의 건축을 중단한 작은 교회로 떠났을 때 많은 목사들이 떠날 수밖에 없는 무슨 이유라도 있었는지, 의아해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교회 역시 교회건축을 중단한 어려운 교회였기에 그가 초심을 따라 결정한 것이다.부산교회는 본래 초량교회에서 나온 교회인데, 초량교회의 목사가 예성을 고집하는 바람에 그 교회 모태신자인 김재철 장로와 신영희 장로를 중심한 지지자들이 따로 나와 우리 교단의 부산교회를 세웠다. 어느 목사를 모시고 부흥되다가 무리하게 교회당을 건축했는데, 재정문제로 공사를 중단하고 목사도 떠나고 신자들도 자꾸 떠나게 되어, 교회가 큰 위기를 만났다. 어느 날, 그가 부산에서 목회할 때 친분이 있는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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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9.05.29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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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목사는 13년 간 북교동교회 목회를 마치고, 1969년에 부산의 부용교회로 부임했다. 목포에서 10년 넘게 목회했으니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어,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몇 교회 후보 중 부용교회는 가장 작은 교회였고, 또 기성과 예성의 중립에 선 교회였다.그때 그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당시 개척교회 설립하기가 어려운데 중립교회를 우리 교단으로 들어오게 하면 교단의 성장에 기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교회 집사들 중에 똑똑한 분들이 많아 그들을 신앙으로 잘 잡아주면 교단의 큰 인물이 되겠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는 자기 욕심보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목사라는 의식이 강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기성을 지지하는 파와 예성을 지지하는 파로 나눠있어서 쉽지 않았다. 그는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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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9.04.2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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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균 목사는 1957년 10월에 함열교회에서 목포북교동교회로 전임하였다. 당시 북교동교회는 2층의 석조교회 건축 중 1층 높이만 쌓고 공사를 몇 개월 동안 중단한 상태였는데, 목회자 중 건축가 출신인 그를 찾아 청빙함으로 그가 헌신시 약속에 따라 부임했다. 그는 옛 석조성전을 헐고, 새성전의 범주 안에다 대형천막을 쳐서 천막교회를 만들었다. 마루와 강대상, 풍금 등 내부는 모두 전에 쓰던 것들로 불편함이 없이 이 천막교회에서 그 해 겨울을 났다. 또한 건축을 무리하게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계획을 세워 진행했다. 건축비용이 모이면 건축에 맞는 자재를 사들이고, 또 목수와 인부들을 불러들여 일을 자세히 지시한 후 감독했다. 기술자들은 건축을 훤히 알고 있는 목사 앞에서 딴소리를 못하고 시키는 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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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9.04.1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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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균은 1950년 5월 23일 서울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혜화동교회를 사임했다. 어머니가 집사로 계시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목회하고 싶어서 동기생 김용은 전도사의 소개로 전북의 김제부용교회로 그해 6월 1일에 부임했다. 그런데 서울을 떠난 지 25일 후, 북한군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났다.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 미리 시골로 피신시키신 것 같아서 감사했다. 그때 서울에 계신 목사님들 여러 분이 납북되었는데, 이건 교장목사와 박현명 목사(총회장)등 성결교회 지도자 여섯 분도 있었다. 서울을 떠나 농촌에 와서 그가 농촌목회의 계획을 미처 세우기도 전에 북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쳐들어 와 서울을 빼앗고 경기도와 충청도로 점점 내려온다는 소식에 모두들 안절부절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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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9.04.1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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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균 청년이 연속 철야기도하던 어느 밤이었다. 어느 순간 큰 빛이 위에서 그에게 내려오는 것 같아 깜짝 놀라 쳐다보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환상이 보이며 음성이 들려 왔다.“내 너를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죽었는데 넌, 날 위해 무엇을 주겠느냐?”하는 말씀이었다.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주여, 이 몸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충만해졌다. 그래서 밤을 새우며 기쁨의 찬송을 계속 불렀다. 이때부터 그는 교회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일을 했다. 주로 주일학교를 맡아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으나 성경지식이 부족했다. 그는 종로 YMCA 회관을 빌려 이호빈 목사님이 초교파적 중앙신학교를 세워 가르친다는 소식에 입학했다. 야간신학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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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9.03.27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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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균(洪淳均)은 일제치하인 1922년 남양 홍씨 32대 종목(鍾睦) 씨와 모친 이순재(李順在)씨의 2남매 중 장남으로 모친의 친정인 경기 여주에서 출생했으나 당시 그의 집은 서울 종로 3가 근처 보익동이었기에 1년 후, 서울 집에 와서 계속 성장을 했다. 그는 8살에 집에서 먼 어이동공립보통학교(지금 효제초등학교 전신)를 걸어서 다녔다. 평소 부지런하고 영리해서 공부도 잘했지만, 당시 5년제로 졸업을 한 후에는 가난해서 가까운 협성실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다. 이 학교가 나중에 수도공고로 발전했다. 그가 실업학교 건축과를 지원한 데는 이유가 있었는데, 집을 짓는 목수가 가장 좋아서였다. 그래서 학교에서 실습할 때 건축현장에 가서 대패질도 배우고, 나무를 깎아 기둥도 세우고, 석가래도 얹었는데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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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9.02.13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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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교회에서 이명해온 인사들은 이전에 소개된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당시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가장의 이동은 곧 가족 모두의 이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연동교회에서 이명해온 교인들 가운데 이명직 약사에 기록되지 않은 인사들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이완순 같은 경우가 그 예다. 그는 연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완순은 연동교회출신 박제원이 1915년에 개척한 경주복음전도관의 두 번째 목회자였다. 그의 뒤를 이어 어려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의 태동기인 1907년 당시 연동교회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교인들이 모였다. 국권을 잃고 나라의 독립을 꿈꾸는 지도자들과 다양한 분야의 유능한 인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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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19.01.1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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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성] - 원세성은 1908년 51세에 48세인 그의 아내 남궁경신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의 직업은 정빈과 같은 전도인이었고 그의 아내 남궁경신도 전도인이었다. 원세성은 박용희와 함께 한일합방 후 농촌전도 및 계몽운동을 위해 안성, 진위, 용인, 죽산, 양성 등지를 전도구역으로 삼고 순방 중에 1911년 용인군 외사면 장평리에 장평교회를 설립했다. 1909년 정신소학교·정신남소학교교감으로도 일했다. 그는 1918년 장로가 되었고 1919년 새문안교회의 조사로 발탁되었다. 그는 대한제국시대 광무황제의 종2품 관직을 지냈고 황국협회의 중직을 맡기도 했다.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으로 돌아온 원세성은 설득력 있는 간결한 설교로 장로교회와 성결교회에서 전도 강연 및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1922년 성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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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19.01.09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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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선표] 배선표는 1905년에 세례를 받았다. 배선표는 어머니와 형, 조카와 함께 연동교회에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했다. 배선표는 연동교회 관리집사로 사역했다. 그는 다석 류영모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류영모는 기독교인으로 동서고금의 철학사상과 유교와 불교를 두루 탐구해 진리를 꿰뚫은 당대의 명사였다. 배선표가 1900년대에 류영모를 연동교회로 인도했다. ‘연동교회 120년사’에는 “배선표는 인품이 훌륭하고 교회 일을 도맡아하는 청지기로 밖으로도 소문이 났다”고 기록되었다. 그는 동경성서학원 재학 중 연동교회가 세운 묘동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그의 아내 박기반은 동경성서학원에서 3년의 과정을 마친 성결교회 최초의 전도부인이다. 배선표는 아내 박기반의 권고로 성결교회로 교적을 옮긴 후 철원에서 목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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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19.01.03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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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빈] 정빈은 1878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으며 1893년 선교사 모어와 김영욱 천광관 조사의 인도로 연동교회 신자가 되었다. 정빈은 연동교회 설립초기에 전도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02년 연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906년부터 작성된 연동교회 세례인명부에 85번째로 기록되었다. 정빈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다음 열심히 성경을 읽었으나 기독교의 진리를 깊이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동경성서학원 입학직전 그의 직업은 연동교회 전도인이었다. 정빈은 고명우라는 한국인 의사의 소개로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를 소개해준 고명우는 남대문장로교회 교인으로 1905년 정빈과 김상준을 1908년 이명직을 동경성서학원에 소개한 분이다. 정빈은 일본 동경성서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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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8.12.2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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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서울에 있었던 구리개복음전도관 부흥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연동장로교회지도급 인사들과 성도들이 대거 이거해 왔기 때문이다. 당시 연동교회는 1700명의 교인들이 모이는 서울과 이남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였다. 그러나 1907년부터 일어난 극심한 내부갈등은 1908년에 가장 심각했다. 결국 이 같은 갈등으로 안동교회와 묘동교회로 분열되었고 연동교회 지도급 인사들과 많은 수의 성도들이 구리개복음전도관으로 이명해온 것이다. 복음전도관은 소금전골(염동)에서 좀 더 넓은 장소를 임대해 1908년 구리개복음전도관(동현)으로 이전했다. 그해 겨울 성령의 은혜가운데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특히 연동교회에서 이거한 이명현 조사, 박용희 조사, 원세성 전도인, 남궁경선 여전도인, 배선표 박제원 등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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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18.12.05 1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