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식과 결혼

하지만 박정배는 너무 일찍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의 뜻을 안 아버지가 휴가 나온 아들을 앉혀 놓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율암리에서 다닌 열 명의 처자들 있지? 눈여겨보니 그 중에 조신하고 예의바르고 인물좋은 처자가 있더라. 나는 그 처자를 꼭 내 며느리로 삼고 싶다. 너와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자칫 잘못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갈 것 아닌가?라는 조바심마저 든다. 네가 휴가 나왔으니 어떻게 해서라도 약혼이라도 해두고 싶다. 내가 직접 말하지 않고 김 집사에게 이미 중매 서 줄 것을 부탁 해 두었다”고 하였다.

정배는 그녀를 만나서 오히려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의지를 꺾을 수 없어 고민을 하다가 아버지의 연세도 있기에 아버지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평소 품행을 보아 아내가 되어도 시부모를 받들면서 내조도 잘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지만 약혼해야 할 당사자는 집에 없었다. 넓은 서울에 가서 뭐라도 배워 직장에라도 다니고 싶었다. 이런 이유로 평소 알고 있던 서울 지인의 집에 있다가 수원 작은 어머니 집에 와보니 작은 어머니는 “너 결혼 시킨다더라” 하는 것이다.

뜻밖의 소식에 이순균 규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 믿음이 좋고 인물도 잘 생기고 기도 대장으로 앞길이 유망한 청년이지만 막상 그 사람과 결혼한다고 하니 북바쳐 오르는 눈물은 그칠 줄 모르게 쏟아졌다.

집에 오니 어머니는 “박정배 청년과 네가 약혼했다. 참석자는 외출 나온 정배 예비신랑, 신랑 부모, 그리고 네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어쩔 수 없이 신부 측에서는 나 혼자만 참석했다. 약혼선물로는 내가 만년필 하나를 선물했다. 김창순 전도사님이 약혼예배를 드렸다” 하시는 것 아닌가?

신랑은 정작 있어야 할 약혼녀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만년필이 약혼녀를 대신해 주었고 약혼식 예배 후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 약혼하고 한 달이나 지났을까? 잠깐 휴가를 왔더니, “휴가 온 김에 아주 정식 결혼식까지 올려야 한다”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매달렸다.

그리하여 1957년 10월 28일 해병대 현역군인 24세 박정배 신랑과 신부 23세 이순균이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서로가 같은 교회에 다녔기에 낯선 얼굴은 아니었지만 결혼식 3일 후 신혼의 단꿈도 미처 깨지 못하고 새색시를 부모님 집에 두고 다시 귀대했다.

결혼식만 올리고 혼자 달랑 남게 된 새색시는 단둘이 신접살림을 차리는 것도 아니고 농사며 밥과 빨래 집안청소까지 새 며느리로서 늘 분주한 일상이었다. 시아버지는 연세가 60이 넘은 노인으로 농사일에 종사하셨고, 시어머니는 바다에 나가 게를 잡으며 해산물을 팔아 자녀들 교육비에 보태느라 늘 집을 비우셨다.

며느리 혼자 집안 살림을 거의 도맡아 하다 보니 정신없이 해가 바뀌고 1년 반이 지난 어느 날 신랑이 만기 제대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노부모와 처자를 거느린 가장으로 이젠 온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데, 그리 많지 않은 농사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때 마침 순창에 계신 숙부께서 “순창으로 와서 제지 공장을 차리면 돈을 벌 수 있다. 순창으로 와서 사업을 한번 해보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평생 고향에 사셨기에 반대하셨지만, 그가 어려운 때 시골에서 사느니 보다 사업하면 좀 더 잘 살 것이라고 계속 설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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