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교회를 환원시킨 부산 부용교회의 사역

홍 목사는 13년 간 북교동교회 목회를 마치고, 1969년에 부산의 부용교회로 부임했다. 목포에서 10년 넘게 목회했으니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어,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몇 교회 후보 중 부용교회는 가장 작은 교회였고, 또 기성과 예성의 중립에 선 교회였다.

그때 그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당시 개척교회 설립하기가 어려운데 중립교회를 우리 교단으로 들어오게 하면 교단의 성장에 기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교회 집사들 중에 똑똑한 분들이 많아 그들을 신앙으로 잘 잡아주면 교단의 큰 인물이 되겠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는 자기 욕심보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목사라는 의식이 강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기성을 지지하는 파와 예성을 지지하는 파로 나눠있어서 쉽지 않았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서적 바른 신앙을 다졌고 그동안 기성과 예성의 신앙과 교리가 똑같은 것을 신자들이 깨닫고 그해 말 사무총회에서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환원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부용교회의 부지와 건물을 교단의 유지재단에 등록시켰다. 신자들의 갈등이 해소되니, 더욱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해서 교회가 알차게 부흥하였다.

교회 건축 중 총회장에 당선된 대전중앙교회의 사역
홍 목사는 부산부용교회를 7년 만에 떠나 대전중앙교회로 1975년에 전임했다. 대전중앙교회는 충청도 성결교회의 어머니교회로서, 그 사명과 의미가 큰 교회였다. 그런데 당시 담임목사가 사임하자, 후임으로 최모 부목사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맞서 혼란스러웠다.

또 그때는 교회창립 60주년을 맞는 때여서 낡은 교회를 헐고 현대적인 교회로 신축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는데, 건축에 조예가 있고, 동시에 혼란한 교회를 잘 수습할 수 있는 목사가 우선 필요해서 장로들이 여기저기 알아 본 결과 그를 청빙한 것이다.

그는 처음 교역자가 되면서 하나님께 결심한 것, 즉 건축을 필요로 하는 교회는 무조건 가야 한다고 기도했다. 그것이 자꾸 생각나 마음을 결정한 후, 간다는 뜻을 알리니 교회에서 조건이 있는데, 부목사로 있는 최 목사가 부용교회로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좋게 생각하고 부용교회 신자들을 설득해서 최 목사와 맞교환 목회를 했다.

그래서 대전중앙교회 건물이 현대적으로 잘 건축되었지만, 어려움도 많았다. 그는 부임 후 건축을 위한 기도회를 자주 갖고 건축을 위한 신앙적 자세와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을 다졌다. 동시에 건축에 필요한 대지를 매입하고 건축비를 준비하다가 부임 3년 만인 1978년 초에 건축을 시작했다. 그는 건축을 아니까 스스로 감독을 하면서 실비로 지을 수 있었지만, 재정이 여의치 않아 1년 6개월이나 건축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건축 중인 1978년 4월 교단 총회에서 목사부총회장으로 당선되었고, 1년 후 그가 시무하는 대전중앙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총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총회 전날 저녁에 헌당식을 거행함으로써 그의 4번째 교회건축이 완료되었다.

그의 총회장 업적 중 역사에 기록될만한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교단 본부건물(성결회관)을 착공한 일이다. 강남 대치동에 땅 500평을 매입하고, 그 해 11월에 기공예배를 드렸고, 헌당식은 이듬해 11월에 했지만, 연건평 1,000평의 10층 건물을 건축한 것은 쾌거였다.

또 하나는 교단의 지방신학교가 그의 총회장 때 총회에서 결정된 것이다. 그때는 중부지역에 대전신학교, 호남지역에 호성신학교, 영남지역에 부산신학교를 인가하여 3개로 시작했다. 그래서 늦게 헌신한 사명자들을 양성하므로 교단 성장에 기여하는데 일조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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