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와 만주교회의 일시 재건

이종무 목사
일제 때 북한지역과 만주지역을 순회 전도하던 이성봉 목사가 북한과 만주의 각 교회를 순회하면서 교회재건을 주도하여 북한과 만주에 산재해 있던 교회들이 조속히 재건되었다.

함북지방회 소속 회령교회, 청진교회, 신암동교회, 포항교회, 운영동교회, 나진교회, 웅기교회, 나남교회, 서수라교회, 성진교회(10교회)와, 함남지방회 소속 함흥북부정교회, 산수정교회, 흥남교회, 영흥교회, 고원교회, 신북청교회, 북청교회, 여포리교회, 원산교회(9개 교회) 그리고, 서부지방회에 소속한 신의주서부교회, 의주교회, 양시교회, 비현교회, 평양상수리교회, 암정교회, 기림리교회, 신안주교회, 진남포교회, 진지동교회(10교회)와 황해도지역의 사리원교회, 신천교회, 문화교회, 북율교회, 해주교회(5교회)에 이어 경기도지역의 개성동부교회, 개성서부교회, 연안교회, 철원교회, 금화교회(5 교회). 이렇게 40여 교회가 문을 열게 되었다. 해방 전에 일제의 강요로 ‘만주기독교단’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던 만주의 성결교회들도 조선예수교성결교회로 환원되었다.

남만주지방의 봉천교회, 무순교회, 북릉교회, 안동교회, 심양교회 등과 동만주지방의 명월교회, 조양천교회, 연길교회, 용정교회, 목단강교회, 도문교회(11교회) 모두 51개 교회가 재건되었다. 이와 같이 재건된 북한교회들은 다시 공산당의 탄압을 받게 되자 여러 교역자들과 신자들이 함께 남하(南下)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의 북한진주와 김일성정권수립은 북한교회가 중대한 시련을 겪도록 했다. 김일성공산정권이 종교의 자유를 내세웠지만 원래 공산주의는 레닌의 공산당선언에서 이미 종교 특히 기독교를 아편으로 여겼던 무신론 정치체제요 사상이었다.

일제탄압에서 해방된 한국교회는 교회재건과 함께 조국재건이란 성스러운 과업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교회재건을 힘쓰는 한편 조국 재건을 위한 최초의 기초 작업에 앞장서기도 했다. 북한은 농촌이나 도시에서나 교회가 중심이 되어 해방을 맞이했고 기독교인들이 자치단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진주한 소련군대는 북한의 교회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다. 1946년 1월에 공산당의 공작으로 조직한 조선기독교연맹위원장 강량욱 목사의 끈질긴 권유와 공산당의 협박 공갈을 뿌리치기 위해 조만식장로가 이끄는 기독교조선민주당을 창당했다. 신의주동부성결교회 이기백 장로는 기독교조선민주당의 평북책임자가 되었다.

그런데 3월 공산당의 계획으로 어떤 명목의 신의주시민대회가 있었다. 공산당을 대표한 평양에서 내려온 34살의 김일성 장군과 민주당을 대표한 38살의 이기백 장로가 연설을 했다. 공산당이 “김일성 만세, 김일성 만세”를 연호했지만 시민들은 아무반응 없이 냉담했다. 그런데 이기백 장로의 연설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와 환성이 쏟아졌다. 김일성이 망신을 크게 당한 것이다.

그날 밤, 신의주소련주둔군사령관이 이 장로를 초대했다. 술을 차려놓고 온갖 감언이설로 공산당에 협조해달라고 회유했다. 조선기독교연맹위원장 강량욱 목사도 동석하여 공산당에 협조할 것을 요청했으나 아무성과 없었다. 공산당과 소련군이 신의주 시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계획했던 공작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래도 공산당은 이기백 장로에게 원치 않는 신의주인민대표(국회의원)를 시키는 등 별별 수단을 썼으나 이 장로는 여전히 조만식장로와 우익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기백 장로는 공산당의 온갖 핍박을 받아오다가 6.25를 만나 공산당의 학살위험으로 피신하였다가 9.28의 유엔군북진으로 해방이 되고 황해자치위원회의 민선도지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1.4후퇴로 황해도가 다시 공산화 되고 은신중 공산당에 발각되어 체포된 후 소식이 끊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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