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동장로교의 신분차별로 인한 갈등과 분립

1908년 서울에 있었던 구리개복음전도관 부흥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연동장로교회지도급 인사들과 성도들이 대거 이거해 왔기 때문이다. 당시 연동교회는 1700명의 교인들이 모이는 서울과 이남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였다. 그러나 1907년부터 일어난 극심한 내부갈등은 1908년에 가장 심각했다. 결국 이 같은 갈등으로 안동교회와 묘동교회로 분열되었고 연동교회 지도급 인사들과 많은 수의 성도들이 구리개복음전도관으로 이명해온 것이다.

복음전도관은 소금전골(염동)에서 좀 더 넓은 장소를 임대해 1908년 구리개복음전도관(동현)으로 이전했다. 그해 겨울 성령의 은혜가운데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특히 연동교회에서 이거한 이명현 조사, 박용희 조사, 원세성 전도인, 남궁경선 여전도인, 배선표 박제원 등이 이명해옴에 따라 복음전도관의 부흥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실 한국성결교회의 형성기에 복음전도관시대의 주요 지도자들은 연동교회 출신이거나 간접적으로 연동교회와 연관된 인물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정빈 김상준 이장하 이명직 이명헌 박제원 이완순 등이다.

그렇다면 연동장로교회 교인들이 대거 복음전도관으로 옮겨온 원인은 무엇인가. 연동교회는 1908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신분차별문제로 교회 안에서 심각한 갈등이 시작되었다. 연동교회의 유성준 이완긍 등 양반들은 어떤 순서도 맡지 않았지만 주일예배 때 강단 위에 앉고 상민들은 강단 가까이에, 그리고 천민들은 출입문 쪽에 앉았다.

연동교회는 1904년부터 출석하기 시작한 10%가량의 양반출신 교인들이 있어서 한동안 양반교회라 칭해졌다. 하지만 1908년 장로 피택과 관련해 교회 안에서 신분 갈등이 일어났고 양반들은 묘동교회와 안동교회로 분립되어 나간 후 연동교회는 억압받던 자들의 비양반교회로 존립했다. 

연동교회 창립에 일역을 담당했던 선교사 모삼열 목사(Samuel F. Moore)는 천민 가운데서도 특별히 백정의 인권회복과 선교활동에 관심을 가졌다. 연동교회에도 상당수의 백정출신 교인들이 있었다. 당시 백정이 교인되는 것과 그 자녀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은 굴욕적인 신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새로 태어남이었다.

1907년 11월 21일에 천만출신 이명혁과 양반출신 이원긍을 장로로 가택했는데, 그 결과 천민출신 이명혁은 장로가 되고 양반출신 이원긍은 장로가 되지 못했다. 특히 1909년 게일 목사가 천민 갖바치 출신 고찬익을 초대장로로, 이어서 노름꾼 출신 이명혁이 장로가 되었고 광대 출신 임공진도 장로후보로 세우려하자 이원긍을 비롯한 양반들이 반발을 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연동교회 내의 극한 갈등상황은 1년 이상 계속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09년 6월 25일 연동교회 제직회에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헐버트 등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행한 게일 목사의 발언에 대해 이원긍 함우택 오경선 등이 천민출신의 장로장립에 심하게 반발함으로 극한갈등이 벌어졌다.

마침내 100여 명의 신도를 데리고 분리해 나가 양반교회인 묘동교회와 안동교회 두 교회로 분립되었다. 한편 연동교회의 광대 출신이었던 임공진은 1914년 12월에 가서야 경총노회에서 장로로 피택되고 1915년 6월에 장로장립식을 거행하였다.

연동교회의 게일 목사는 교회분열의 아픔에 직면하면서도 “하나님의 선교는 인간사회제도가 마련한 계급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눌려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진정한 복음이다”라고 여겼다.

연동교회에서 조사와 전도인 등 교회의 지도자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들이 여러가지 열악한 복음전도관의 상황과 또한 당시 언론과 주변교회들의 비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명한 정빈이 가교역할을 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