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김제부용교회 목회와 함열교회 건축

홍순균은 1950년 5월 23일 서울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혜화동교회를 사임했다. 어머니가 집사로 계시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목회하고 싶어서 동기생 김용은 전도사의 소개로 전북의 김제부용교회로 그해 6월 1일에 부임했다.

그런데 서울을 떠난 지 25일 후, 북한군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났다.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 미리 시골로 피신시키신 것 같아서 감사했다. 그때 서울에 계신 목사님들 여러 분이 납북되었는데, 이건 교장목사와 박현명 목사(총회장)등 성결교회 지도자 여섯 분도 있었다.

서울을 떠나 농촌에 와서 그가 농촌목회의 계획을 미처 세우기도 전에 북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쳐들어 와 서울을 빼앗고 경기도와 충청도로 점점 내려온다는 소식에 모두들 안절부절했다. 7월 14일에 인민군이 김제에 들어왔다.

동료 목회자들이 피란을 가자고 했지만, 그는 피란을 가지 않고 공산군에게 잡혀죽더라도 전도사답게 전도하다 죽으려고 결심했다. 두려움 속에서도 2개월 동안 죽을 각오로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는 물론 매일 새벽기도회까지 빠지지 않고 인도하면서 신자들을 위로했다.

전쟁 중에 그의 교회만 예배를 드리니까 목사가 피란을 간 이웃 장로교회 신자 몇 사람이 와서 예배를 드렸다. 수복 후에 장로교회 목사가 피란 갔다가 돌아왔는데, 그 교회 신자들이 목사를 불신하고 도리어 홍 전도사를 더 귀히 여겨 나중에는 성결교회로 교적을 옮겨왔다.

그는 1953년 4월 23일 제8회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당시 아직 전쟁 중이어서 총회가 부산 수정동교회에서 거행됐다. 그가 목사안수를 받고 나자 함열교회에서 청빙했다. 함열교회는 1920년에 개척된 교회였으나 당시 교세가 약한 형편이어서 겨우 장년이 2,30명이 모였다.

그는 전도를 목적으로 바리캉을 사다가 동네아이들 머리를 손수 깎아주니 아이들이 좋아하며 교회에 나와 주일학교가 부흥되었다. 또 농번기에는 교인들의 논밭에 나가서 일손을 거들어 주니 신자들도 좋아했고, 미신자들도 교회에 친근감을 갖게 되어 교회가 점점 부흥하였다.  

그가 주민에게 다가가 봉사하니까 마을 어른들도 교회에 관심을 가지다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다. 교회가 부흥되니까, 예배당이 좁아서 넓은 대지를 사서 교회를 이전했다. 그가 건축가 출신이라 비용도 절감하고 건축을 했는데, 그의 두 번째 교회건축이었다. 

그가 교회당 건축하느라 온 힘을 쏟은 후 마침 충청도 부여의 석동교회에서 그를 청빙했다. 그 교회는 온 마을이 모두 예수를 믿어 약 2백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였다. 그는 이진관 장로에게 전임의사를 얘기했더니, “목사님이 알아서 하시라”고 대답했다. 그는 가도 좋다는 뜻인 줄 알고 부여 석동교회에 승낙의 서신을 보냈다.

그가 떠나는 날 아침에 이 장로가 그의 집으로 식사 초대했다. 식사 중 이 장로가 밖으로 나가더니, 방문을 걸어 잠근 후 교회에 가서 종을 쳐, 모인 신자들을 보내어 “목사님 우리 교회를 못 떠납니다, 우릴 버리고 다른 교회로 가면 안 됩니다.”하고 밖에서 간청하게 했다. 그는 식사 중에 당한 일이라 얼마나 당황했는지, 방문 열고 나가지도 못하고 갇힌 신세였다.

두 시간 후 석동교회 집사들이 트럭을 몰고 오자, 석동교회 집사들과 함열교회 집사들이 서로 ‘목사님이 떠난다, 못 떠난다’하고 옥신각신했다. 나중에는 큰 소리를 내며 서로 싸우려고 하자, 할 수 없이 그가 손을 들고 말았다. 안 떠난다고 소리쳤다. 할 수 없이 석동교회 신자들이 홍 목사를 만나지도 못하고 포기하고 떠나버리자, 그때야 문을 열어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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