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단 부흥사회 회원들은 낮에 기독교 순례길을 걷고 밤에는 부흥사의 자질 함양을 위한 세미나와 기도회를 열었다. ‘나의 부흥회를 말한다’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는 총재 김신관 목사(에덴교회)와 전 대표회장 김용운 목사(옥동중앙교회), 김우곤 목사(성민교회)가 각자의 부흥회 인도 노하우를 제시했다. 김신관 목사는 부흥회가 없는 조치원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었는데 당시 성락교회 박태희 목사의 부흥회에 참여했다가 은혜를 받았다고 운을 뗐다. 그 때 방언을 받기 위해 부르짖다가 온 가족이 목이 쉬었는데, 그 이후 100일 새벽기도회에서 성령을 체험했다고 고백했다. 김신관 목사는 “부흥회하는 교회는 망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부흥사 사역이 중요하다”면서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부흥사가 되어야 한다”고
특집
황승영 기자
2019.04.17 16:25
-
홍순균 목사는 1957년 10월에 함열교회에서 목포북교동교회로 전임하였다. 당시 북교동교회는 2층의 석조교회 건축 중 1층 높이만 쌓고 공사를 몇 개월 동안 중단한 상태였는데, 목회자 중 건축가 출신인 그를 찾아 청빙함으로 그가 헌신시 약속에 따라 부임했다. 그는 옛 석조성전을 헐고, 새성전의 범주 안에다 대형천막을 쳐서 천막교회를 만들었다. 마루와 강대상, 풍금 등 내부는 모두 전에 쓰던 것들로 불편함이 없이 이 천막교회에서 그 해 겨울을 났다. 또한 건축을 무리하게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계획을 세워 진행했다. 건축비용이 모이면 건축에 맞는 자재를 사들이고, 또 목수와 인부들을 불러들여 일을 자세히 지시한 후 감독했다. 기술자들은 건축을 훤히 알고 있는 목사 앞에서 딴소리를 못하고 시키는 대로 일했다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9.04.17 14:56
-
부활절은 기독교의 최대 축제이다. 그런데 부활절이 되면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부활절 날짜는 왜 해마다 바뀌는 것이고,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부활절 날짜가 왜 다른 것인가? 부활절 날짜와 유래, 또 부활절을 어떻게 지켜왔는지 교회사적으로 살펴본다. 부활절 명칭은 어디서 기원했는가?영어로 부활절을 ‘이스터’(Eater)라고 하고, 독일어로는 ‘오스텐’(Ostern)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단어가 튜턴족의 아침(혹은 봄의) 여신인 ‘에오스터’(Eostre)와 관련된 것으로 주장하면서 부활절 명칭의 기원으로 주장하는 글들이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영국 교회역사가이자 수도사인 베다 베네라빌리스(Beda Venerabilis, 673-737)가 쓴 ‘시간계산에 대해’(De temporum ratione)라
특집
황훈식 목사(청주서문교회 협동)
2019.04.17 14:47
-
3.1운동 당시 주한외국인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표명한 정교분리 원칙은 우리민족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반민족적 혹은 더 나아가 친일적인 행동이었는가?한국에 파송된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은 그들의 파송 교단과 신학적 성향으로 정교분리의 원칙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이를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최대관심인 내세적 신앙과 전도를 통해 교세확장에만 열을 올리지 민족의 독립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보여졌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선교대상인 한국의 문제에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끌어안으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혹은 그 범위를 뛰어넘어 과감히 행동했음을 역사가 말해 준다. 3.1운동 이전에도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은
기획
황훈식 박사(서울신대 강사)
2019.04.10 17:23
-
홍순균은 1950년 5월 23일 서울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혜화동교회를 사임했다. 어머니가 집사로 계시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목회하고 싶어서 동기생 김용은 전도사의 소개로 전북의 김제부용교회로 그해 6월 1일에 부임했다. 그런데 서울을 떠난 지 25일 후, 북한군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났다.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 미리 시골로 피신시키신 것 같아서 감사했다. 그때 서울에 계신 목사님들 여러 분이 납북되었는데, 이건 교장목사와 박현명 목사(총회장)등 성결교회 지도자 여섯 분도 있었다. 서울을 떠나 농촌에 와서 그가 농촌목회의 계획을 미처 세우기도 전에 북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쳐들어 와 서울을 빼앗고 경기도와 충청도로 점점 내려온다는 소식에 모두들 안절부절했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9.04.10 17:21
-
서울신학대학교 글로벌사중복음연구소(소장 최인식 교수)는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며 사중복음 역사탐방을 기획했다. 당시 역사탐방은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인 ‘개신교 복음주의 웨슬리안 사중복음 신학’을 역사적 현장 속에서 더 깊이 연구하고 논의하기 위해 결정된 것이었다. 유럽의 종교개혁지를 필두로 총 4회에 걸친 사중복음 역사탐방을 결정했으며 이미 유럽(체코, 스위스, 독일)과 일본에서 탐방을 진행했다. 유럽 탐방을 통해서는 루터의 중생을 성화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하고 사중복음 제네바선언으로 결실을 맺은 바 있다. 일본 탐방에서는 한국으로 사중복음이 전파되는데 연결고리 역할을 한 일본의 OMS가 당시 미국의 만국성결교회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기획
한국성결신문
2019.03.27 17:30
-
성결교회의 부흥을 견인할 차세대 리더로 손꼽히는 장승민 목사(낙원교회·사진)는 ‘오직 예수’라는 확고한 목회철학으로 사중복음을 목회 현장에 적용하고 있다. 장 목사의 오직 예수의 목회철학이 사중복음을 만나면서 교회 사역현장은 더욱 풍성해 지고 있으며 귀한 열매를 맺고 있다. 장승민 목사는 미국의 리버티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 과정을 공부하면서 북미 침례교의 대표주자인 릭 워렌 목사(새들백교회)의 목회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장 목사는 박사 과정 중 ‘목적이 이끄는 삶’이 구조와 내용적인 부분에서 사중복음 목회와 일치한다는 점을 발견하고, 성결교단의 사중복음과 릭 워렌 목사의 목회철학과 융합할 수 있는 길을 진지하게 모색했다.사중복음의 관점에서 릭 워렌 목사의 목회를 분석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장승민 목
기획
한국성결신문
2019.03.27 17:28
-
웨슬리 정신을 현대의 사역현장에 녹여서 새로운 형식의 목회를 펼치고 있는 교회를 소개한다. 북미침례교와 미국연합감리교회가 압도적인 교세를 이루고 있는 미국에서 웨슬리 정신에 입각한 군소교단의 후발 주자로서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12돌교회는 그 놀라운 부흥을 현재 경험하고 있다.12돌교회는 케빈 마이어스(Kevin Myers) 목사가 1987년에 개척했다. 개척 후 빠르게 성장해 지금은 8개의 예배 처소를 가진 대형교회가 되었다. 2010년 말에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로 선정되었으며, 미국 전체에서 40번째로 큰 교회로 보고되었다. 12돌교회는 웨슬리안 교단(Wesleyan Church)에 소속된 교회이자 웨슬리 정신에 입각한 교회이다. 또 12
기획
한국성결신문
2019.03.27 17:26
-
1919년,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3.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와 단합된 저항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제의 무력에 의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은 비정치화의 길로 가고 행동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이념에 몸을 던져 독립운동에 나서게 되었다.이후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을 획책하면서 한국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그 뿌리가 같다는 ‘일선동조설’에 근거하여 내선일체를 부르짖고, 황국신민으로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역사적 사명이요 영광이라는 ‘국민총동원령’을 발동하였다. 무엇보다도, 한국성결교회는 일제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기획
박문수 박사(현대기독교연구소)
2019.03.27 13:47
-
홍순균 청년이 연속 철야기도하던 어느 밤이었다. 어느 순간 큰 빛이 위에서 그에게 내려오는 것 같아 깜짝 놀라 쳐다보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환상이 보이며 음성이 들려 왔다.“내 너를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죽었는데 넌, 날 위해 무엇을 주겠느냐?”하는 말씀이었다.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주여, 이 몸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충만해졌다. 그래서 밤을 새우며 기쁨의 찬송을 계속 불렀다. 이때부터 그는 교회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일을 했다. 주로 주일학교를 맡아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으나 성경지식이 부족했다. 그는 종로 YMCA 회관을 빌려 이호빈 목사님이 초교파적 중앙신학교를 세워 가르친다는 소식에 입학했다. 야간신학교여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9.03.27 13:43
-
공생원을 나와 다시 해양대학로에서 신인비치호텔을 지나 15분 정도 걸으면 도로 왼쪽에 맛집 ‘선경준치전문점’이 나온다. 맛집을 끼고 좁은 골목길 해안로 57길을 따라 걸어 들어간다. 골목길 오른쪽은 담장이 높다. 조선내화 공장이다. 1938년 일제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경제수탈의 일환으로 조선내화를 설립한다. 해남 성산광산에서 원료 납석을 들여오고 생산한 완제품 내화벽돌을 실어 나르기 쉽도록 유달산 남쪽 기슭 선창가에 지었다. 1947년 당시 목포재벌 손용기가 적산으로 불하받아 조선내화를 재창립한다. 1953년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조선내화를 성옥 이훈동 회장이 인수한다. 1964년 시멘트산업이 급성장하기 시작하고 1973년에는 포항제철을 준공하면서 내화물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대한민국 산업화
기획
최석호 교수
2019.03.13 13:52
-
1894년 4월 18일 목포에 도착한 선교사 레이놀즈와 드루는 다순구미 선창가 노방전도 중 한양에서 언더우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는 사람을 만난다. 고종 황제가 목포를 곧 개항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선교사 레이놀즈와 유진 벨은 1896년 2월 목포를 다시 찾는다. 목포 선교의 거점이 될 양동 언덕배기 땅을 매입한다. 1897년 10월 1일 고종은 목포를 개항한다. 156호 600여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 바다와 갯벌 위에 자주적 개항장 목포가 탄생한다. 1898년 유진 벨 선교사는 양동교회를, 함께 들어 온 의료선교사 오웬은 프렌치병원을, 1899년 목포로 들어온 교육선교사 스트래퍼는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를 개교함으로써 목포선교부를 완성한다. 그러나 일제는 1900년 목포에
기획
최석호 교수
2019.03.13 13:51
-
성결교회는 일제강점기 당시 재림신앙을 이유로 어떤 교단보다도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성결교회가 타 교단에 비해 더 많은 수난을 당했던 이유는 ‘재림신앙’ 때문이었다. 성결교회의 종말론은 재림하신 그리스도가 지상에 내려와서 성도들과 함께 세상을 통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지상에서 천년 왕국을 의로 통치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전 천년설이 그들이 갖고 있는 국가의 이념에 위배된다고 판단해 성결교회를 핍박하고 교단까지 해산시켰다. 성결교회의 핍박은 교단과 경성신학교 해산, 교인들과 교회 핍박, 활천의 폐간 등으로 설명된다. 일제는 1943년 경성신학교 교수를 비롯한 교단의 지도자들에게 미리 작성한 해산성명서를 내 놓고 서명을 요구하였다. 성결교회의
특집
박종언 기자
2019.02.27 13:42
-
1919년 3.1운동 당시 조선에 머물고 있었던 외국인 선교사는 장로회 소속 182명, 미감리회 50명, 남감리회 33명이었으며 성결교와 관련된 동양선교회 소속 선교사는 9명이었다. 일제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주동자들을 체포하는 동시에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을 선동자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과 간담회 형식으로 비밀리에 접촉했는데 3.1운동 확산을 막기 위해 조선인들을 설득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제의 기대와는 다르게 선교사들은 막후에 열린 간담회에서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조선총독부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또 3.1운동을 민족 혁명으로 인식하고 해외에 3.1운동이 일어난 이유를 적극 알리는 일도 선교사들의 몫이었다. 특히 동양선교회
특집
박종언 기자
2019.02.27 13:40
-
3.1운동은 일본제국주의에 무기력하게 짓눌려온 굴욕적인 삶에 대한 공동체적인 저항이자 평화와 공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런 저항 속에서 전국적으로 긴밀한 연결망을 가진 기독교는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되는 구심점이 되었고 성결교회의 참여는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성결교회는 다른 교단과 단체에 비해 수적으로는 3.1운동에 상대적으로 적게 참여한 것은 사실이다. 1907년 교단이 생긴 후 12년 밖에 지나지 않아 아직 교단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작은 전도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원은 적었을지 몰라도 풀뿌리운동처럼 성결교인들은 지역 곳곳에서 3.1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에 저항하는 등 행동하는 신앙의 양심을 보여줬다. 아직 교단의 모습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작은 전도관이었지만 나라를 사
특집
박종언 기자
2019.02.27 13:37
-
홍순균(洪淳均)은 일제치하인 1922년 남양 홍씨 32대 종목(鍾睦) 씨와 모친 이순재(李順在)씨의 2남매 중 장남으로 모친의 친정인 경기 여주에서 출생했으나 당시 그의 집은 서울 종로 3가 근처 보익동이었기에 1년 후, 서울 집에 와서 계속 성장을 했다. 그는 8살에 집에서 먼 어이동공립보통학교(지금 효제초등학교 전신)를 걸어서 다녔다. 평소 부지런하고 영리해서 공부도 잘했지만, 당시 5년제로 졸업을 한 후에는 가난해서 가까운 협성실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다. 이 학교가 나중에 수도공고로 발전했다. 그가 실업학교 건축과를 지원한 데는 이유가 있었는데, 집을 짓는 목수가 가장 좋아서였다. 그래서 학교에서 실습할 때 건축현장에 가서 대패질도 배우고, 나무를 깎아 기둥도 세우고, 석가래도 얹었는데 나중에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본지 편집위원장)
2019.02.13 16:19
-
해맑은 웃음이 아름다운 양금숙 사모(대명교회)는 날개 없는 ‘천사’로 통한다. 아이 둘 딸린 가난한 목회자에게 시집와서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전처가 낳은 자식까지 키웠다. 그리고 쌍둥이 아들과 딸까지 낳아 가정에 새로운 행복도 안겨주었다. 남편 오세현 목사가 없을 때는 설교며 심방 등 웬만한 교회 사역을 혼자서 척척 해낸다. 집 근처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 교사 일까지는 하는 그녀는 작은 체구에서 그 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집 안 일에 남편 내조, 교회 사역까지 1인 3역을 거뜬히 해낸다. 이런 그녀와 결혼한 오 목사는 천사 같은 아내 덕분에 언제나 신나 종일 일을 해도 힘이 하나도 들지 않고 웃음만 나온다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까지는 험난한 준령이 많았다. 부
특집
김정례 기자
2019.02.13 13:58
-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대표 진용식 목사)가 최근 발표한 신천지 동향에 따르면, 신자들보다 비신자들에 대한 포교가 대폭 증가했다고 한다. 3~4년 전만 해도 신천지에 빠지는 사람들의 90% 정도가 신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신천지 내담자들의 거의 70% 정도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교회 성도들은 신천지를 여전히 주의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교회에서 활약하는 추수꾼 포교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신천지 신도들은 아무나 노리는 게 아니다. 그들 나름대로 ‘알곡’ 가르기라며 포교하기에 좋은 사람들을 집중 타깃으로 한다. 자신들이 볼 때 A급 신도들은 포교 타깃으로 놓고 전방위적 공략을 하고, D급 신도들은 가라지라며 포교대상에서 제외한다. 목회
특집
정윤석 기자
2019.02.07 15:30
-
최근 제3기 신도시가 발표되면서 신도시에서의 교회개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새로운 인구의 유입과 발전가능성이 높아 신도시를 찾아가는 목회자가 늘고 있다. 그러나 높은 분양가와 지지부진한 성장 등 높은 현실의 벽 앞에 문을 닫고 떠나는 목회자도 있다. 신도시 공략을 위해 신도시의 성결교회의 상황을 살피고, 전략적 개척과 거점 확보를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발전 가능성 많지만 현실 벽도 높아김포한강신도시는 2012년 경기도 김포시의 장기지구, 운양지구, 구래지구, 양곡지구, 마산지구 등으로 구성되어 부지면적 3,585,567.
기획
박종언 기자
2019.01.30 15:21
-
“적은 수라도 시골교회엔 큰 힘”도시교회 동참이 관건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매년 설이 되면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은 서로에게 덕담을 건네며 건강을 기원한다. 기독교인이라면 해야 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가족들과 함께 고향교회에 방문 해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일이다. 1년에 두 번 있는 명절이지만 고향교회에서의 예배는 가족 간의 신앙을 돈독히 하고 침체된 농어촌교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된다. 미래목회포럼(대표 김봉준 목사)은 올해도 고향교회 방문 캠페인을 진행한다. 미래목회포럼은 ‘명절에는 무조건 고향교회를 방문해 함께 예배를 드리기’, ‘감사헌금과 목회자에게 선물 드리기’, ‘시골교회 목회자에게 반드시 “고향교회를 지켜주셔서 고맙다”고 표현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격
특집
박종언 기자
2019.01.30 1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