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마지막 승리자는 곧 그리스도” 주장
교단 강제 해산·활천 폐간 … 박봉진 목사 순교

▲ 폐교의 아픔을 딛고 1946년 열린 경성신학교 졸업식.
성결교회는 일제강점기 당시 재림신앙을 이유로 어떤 교단보다도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성결교회가 타 교단에 비해 더 많은 수난을 당했던 이유는 ‘재림신앙’ 때문이었다.

성결교회의 종말론은 재림하신 그리스도가 지상에 내려와서 성도들과 함께 세상을 통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지상에서 천년 왕국을 의로 통치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전 천년설이 그들이 갖고 있는 국가의 이념에 위배된다고 판단해 성결교회를 핍박하고 교단까지 해산시켰다.

성결교회의 핍박은 교단과 경성신학교 해산, 교인들과 교회 핍박, 활천의 폐간 등으로 설명된다. 일제는 1943년 경성신학교 교수를 비롯한 교단의 지도자들에게 미리 작성한 해산성명서를 내 놓고 서명을 요구하였다. 성결교회의 재림교리가 일본의 국체에 위배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성결교회는 그해 12월 29일 강제로 해산되었고 경성신학교도 폐교를 당했다. 교단이 해산되면서 성결교회 예배당은 적산(적국의 재산)으로 분류되어 강제 압수되고 방매(헐값에 매매)되었다.

일제에 항거했던 교인들과 교회의 핍박도 이어졌다. 일제는 1943년 5월 24일 오전 5시를 기하여 성결교회 교역자 200명과 장로와 집사 100여 명을 검거하였다. 당시 경성신학교 교수들도 모두 연행되었으며 6월 20일에는 김은규를 비롯한 몇몇 학생들도 서대문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은규 학생은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5개월 만에 옥에서 사망했다.

이때 검거되었던 성결인은 철원의 박봉진 목사, 함흥의 김호 목사, 김하석 목사와 군산의 정태희 장로, 신안주의 김지봉 집사 등이며 이들 중 일부는 “신사는 우상이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고, 천황도 사람에 불과하므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그리스도는 세상의 유일한 통치자로 오시고, 이 땅에 성도들과 함께 천년왕국을 건설하신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순교하였다.

이에 앞서 1941년에는 금화성결교회 한정우 집사와 박윤상 집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독일이 아무리 강하고, 일본이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전쟁의 마지막 승리자는 이 같은 강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취조를 당했다.

이 외에도 1941년 12월 경북 군위교회 최헌 목사는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고 기근과 전쟁 같은 말세의 징조가 많이 나타난다”고 설교했고, 신자들은 당시 독립사상이 담긴 노래 등을 불렀던 사실이 문제가 되어 체포되었다. 부여 은산교회의 손갑종 목사도 1943년 신사참배 문제로 경찰에 여러 차례 호출되어 조사를 받았고, 경찰이 “천조대신과 기독교 하나님 중 누가 높은가?”를 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42년 12월에는 성결교회의 재림사상을 알리던 신앙잡지 활천이 폐간되었다. 1922년 11월 25일 교단의 기관지로 창간된 활천은 초교파적으로 많은 독자를 확보한 인기 있는 신앙잡지였다. 여기에는 교단의 동정은 물론이고 성서강해, 설교, 번역, 간증, 그리고 재림을 비롯한 사중복음에 관련한 기고문들이 실렸다.

당시 일본은 성결교회의 교리가 일본국체와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보기 위해 활천과 주요서적들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약 8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조사할 정도로 활천의 역할은 독보적이었다. 이렇게 일제의 검열과 감시를 당하던 활천은 1942년 12월 통권 228호를 발간하고 폐간되고 말았다. 또한 1934년 11월호부터 매달 1,700여 부를 발행하던 성결교 여성지인 ‘기쁜 소식’도 이때 활천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박문수 박사는 “성결교회의 많은 교역자와 신자들은 일제에 검거된 후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재림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며 “결국 교단 해산과 학교 폐쇄라는 비운을 맞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의 결기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