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애환에 젖은 생명길 역사가 되다

1894년 4월 18일 목포에 도착한 선교사 레이놀즈와 드루는 다순구미 선창가 노방전도 중 한양에서 언더우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는 사람을 만난다. 고종 황제가 목포를 곧 개항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선교사 레이놀즈와 유진 벨은 1896년 2월 목포를 다시 찾는다.

목포 선교의 거점이 될 양동 언덕배기 땅을 매입한다. 1897년 10월 1일 고종은 목포를 개항한다. 156호 600여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 바다와 갯벌 위에 자주적 개항장 목포가 탄생한다. 1898년 유진 벨 선교사는 양동교회를, 함께 들어 온 의료선교사 오웬은 프렌치병원을, 1899년 목포로 들어온 교육선교사 스트래퍼는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를 개교함으로써 목포선교부를 완성한다.

그러나 일제는 1900년 목포에 영사관을 짓는다. 1923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도 개설한다. 토지 및 농산물 수탈창구를 위해서였다. 자주적 개항장 목포가 식민지 수탈도시로 변모한 목포 일본인 거주지 남촌이다.

▲ 목포 유달동과 만호동 전경.
개항 전 600명에 불과하던 목포는 1935년 인구 6만 명을 돌파하면서 전성시대를 맞는다. 이때 목포에서 조선인의 애환을 담은 노래, 목포의 눈물이 탄생한다. 일제는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라는 가사를 문제 삼아 금지곡으로 지정한다.

유달산 노적봉에는 이순신 장군의 자취를 품고 있다.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은 그 해 겨울을 목포에서 보냈다. 일제로서는 잊고 싶은 13척 대 133척 그 치욕스러운 역사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자랑스러운 옛 영광이다. 이렇듯 목포의 눈물은 조선의 눈물이다. 한과 흥이 교차하는 목포 생명길을 걷는다.

▲ 정명여학교 100주년 기념관
정명여학교 100주년 기념관
목포역을 빠져나와 정명 건널목을 지나 계속 직진하면 목원동 행복복지센터 네거리다.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어서 300미터 가량 들어가면 목포정명여자고등학교다.

1919년 4월 8일 조용했던 목포 거리가 만세소리로 가득 찬다. 양동교회 교인과 정명여학교 학생들 그리고 영흥학교 학생들이 주축을 이룬 4.8독립만세운동이다. 교회 지하실과 학교 기숙사에서 태극기를 그렸다.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학교 구내 선교사 사택에서 독립선언서를 준비했다.

1983년 보수공사를 하던 중 천장에서 깡통을 발견한다. ‘독립가’, ‘3.1독립선언문’, ‘2.8독립선언문’, ‘조선독립 광주신문’, 격문 ‘警告我二千萬同胞’(경고아이천만동포) 등 다섯 종류 독립선언 관련 문서가 쏟아진다. 1990년 정명여학교에서는 선교사 사택을 100주년 기념관으로 가꿔서 독립운동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목포만세운동 때 양동교회 성도와 정명여학교 그리고 영흥학교 학생들이 불렀던 독립가다.

정명여학교 학생 7명 애국자 포상
2012년 8월 13일 국가보훈처는 67주년 광복절을 맞아 애국지사 198명을 포상했다. 이 가운데 여성은 일곱 명. 김나열·곽희주·김옥실·박복술·박음전·이남순·주유금이다. 이들이 목포 4.8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정명여학교 학생들이다.

이들은 1921년 11월 14일 오포 소리를 신호로 또 다시 거리에 나섰다. 워싱턴국제회의에 조선독립 문제를 의제로 상정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곽희주·박복술은 징역 10월, 김나열·김옥실·박음전·이남순·주유금은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당사자들이 유공자 신청을 한 것이 아니다. 일곱 명의 애국지사는 “조선 사람이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무슨 애국지사냐”며 애국지사 신청을 한사코 말렸다. 국가보훈처가 일곱 명을 발굴했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다음이었다.

공생원에 있는 윤치호와 윤학자 동상.
윤치호 전도사가 세운 공생원
가던 길을 되돌아 유달산 노적봉으로 향한다. 노적봉에서 반대쪽 유달로를 따라 내려가는 길을 걸어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계속 직진하면 유달로 69번길 오른쪽에 둘로 나뉜 오르막길 대반동길로 들어선다. 한적한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면 5분도 채 되지 않아 골목길 언덕 맨 위 구멍가게 부광상회에 닿는다.

부광상회 앞에서부터 전망이 확 터지면서 목포 앞바다에 길게 누운 고하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대반동 부광상회 아래로 골목길을 계속 걸어가면 신안비치호텔이 눈앞에 보이는 해안도로 해양대학로에 나선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도로 가에 공생원이 있다.

다우치 치즈꼬, 목포 최초 시민장 치러
1924년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줄리아 마틴을 만나면서 기독교인이 된 윤치호(1909~?)는 1928년 어느 날 다리 밑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7명의 고아를 발견한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공생원을 시작한다. 1933년 피어선신학교를 졸업한다. 고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정명여학교 음악교사 다우치 치즈꼬도 손을 보탠다. 1938년 윤치호 전도사와 결혼한 다우치 치즈꼬는 윤학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윤치호는 1951년 1월 21일 전남도청을 방문하러 광주에 간다. 아이들을 먹일 식량이 없었다. 광주중앙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리고 늘 가던 한양여관에 투숙했는데 한밤에 청년 세 사람이 윤치호를 데려갔다. 이후로 윤치호를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윤학자는 계속 남아서 모두 3,000명에 달하는 고아를 길러낸다.

1968년 10월 31일 윤학자는 “매실장아찌가 먹고 싶구나”(梅干しが だべたい)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한다. 이 말을 들은 오부치게이조(小·三, 1937~2000) 총리는 매화나무 20그루를 기증한다. 죽어서라도 매실장아찌를 맘껏 드시라는 뜻이다. 11월 2일 공생원 원생들이 ‘봉선화’를 합창하는 가운데 영구차는 공생원을 떠나 목포역으로 향했다. 시민 3만 명이 목포역 광장을 가득 메웠다. 목포 최초의 시민장이었다.

성옥기념관
성옥기념관과 이훈동 정원
해안로 57번길 골목길을 계속 걸어서 들어가면 조선내화 공장이 끝나는 위치에 온금경로당 옆 음수대가 나온다. 이곳에서 다시 산동네로 오른다. 부산 감천문화마을이나 통영 동피랑벽화마을을 연상시키는 따뜻한 산동네 다순구미다. 다순구미에서 다시 유달로로 나와서 유달산 방향으로 걸어 올라가면 유달산으로 이어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성옥기념관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추사체를 완성한 뒤 일생을 회고하면서 쓴 이곡병, 조선 3대란이라 일컬었던 ‘석파란’과 ‘운미란’이 이곳에 있다. 그뿐인가! 소치 허련이 그린 ‘목단 8곡병’, 손자 남농 허건이 그린 ‘금강산 보덕굴’ 등 그야말로 남도남종화의 보물창고다.

이훈동 가옥은 성옥기념관과 연달아 있는 건물이다. 이훈동 가옥 정원은 1930년대 일본인 곡물상 우찌다니 만뻬이(內谷萬平)가 지관을 통해 영산강 유역 별장 터를 찾다가 발견한 곳이다. 이 집을 사들인 성옥 이훈동 회장은 정원을 효동산으로 가꾸기 위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문화와 마찬가지로 일본정원도 백제와 신라 연못 및 정원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중일 3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서(庭園書)인 일본의 작정기에는 정원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로 산·물·돌 등을 꼽는다. 산이 왕을 뜻한다면, 물은 신하, 돌은 신하 중에서도 왕을 보좌하는 신하를 의미한다. 왕과 신하가 조화를 잘 이루면 좋은 나라가 되는 것처럼 산과 바위 그리고 물이 잘 조화를 이루면 아름다운 정원이 된다.

▲ 목포개항장 순례지도
조선내화 목포공장은 멈췄지만 공장이 힘차게 돌아가던 그때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정겨운 산업유산이다. 남도남종화와 백제 별서정원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되어 목포개항장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다순구미와 목포개항장 일대를 허물고 아파트를 지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내화에서는 공장터를 서둘러 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목포시민은 역사문화지구로 지정했다. 삶과 신앙 그리고 유산은 목포시민과 함께 목포개항장에 고스란히 남았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