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국체명징과 한국성결교회의 재림신앙
“재림신앙, 일제 국체 맞서 종말론적 전망 제시”

1919년,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3.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와 단합된 저항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제의 무력에 의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은 비정치화의 길로 가고 행동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이념에 몸을 던져 독립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을 획책하면서 한국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그 뿌리가 같다는 ‘일선동조설’에 근거하여 내선일체를 부르짖고, 황국신민으로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역사적 사명이요 영광이라는 ‘국민총동원령’을 발동하였다.

무엇보다도, 한국성결교회는 일제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교단이다. 일제는 재림신앙을 전파하던 활천을 폐간하고(1942.12), 교단 합동과 신학교 통폐합을 강요했다.(1943). 또 다수의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검거하여 고문을 해 순교를 초래하였고(1943.5.24), 교단마저 해산하도록 만들었다.(1943.12.29) 그리고 교회건물들은 몰수되어 적산관리 대상이 되었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성결교회를 강제로 해산한 이유는 성결교회의 재림신앙이 일본의 국체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일제가 주장했던 ‘국체’란 무엇인가? 국가주권의 주체가 국민이 아닌 천황에게 있으며, 국민들은 천황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였다. 일본 명치유신 정부는 근대화를 지향하면서 군주정치 모델인 ‘천황제’를 수립했다.

1889년에는 ‘제국헌법’을 발효하여 제1조에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고 하였고, 제3조에 “천황은 신성하여 침범하지 못한다”고 명시하여 “천황의 신성한 직접 통치”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것을 실현하고자 일제는 ‘국민교육’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1890년 ‘교육칙어’를 발표하여 “현 천황은 황손의 혈통이자 현인신(現人神)이다. 국민의 본의는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에 있다”며 황국신민 의식을 강조하였다.

한국성결교회는 교파합동과 신학교통합, 그리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일제의 종교정책에 1940년을 기점으로 순응하거나 저항하는 양면적 태도를 보였다. 총 300명에 해당하는 교역자와 신자들이 검거되어 “천황이 높은가 하나님이 높은가? 천황도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아야 할 사람인가?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세상권력을 심판하는가? 지상에 새로운 천년왕국을 세울 것인가?”를 질문 받았을 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교단의 해산이라는 비운을 맞았지만, 교단의 입장과는 달리 재림신앙을 가진 성결인들은 순교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이명직 목사는 타 교단 대표들과 함께 이세신궁(건국신화의 천조대신을 참배하는 곳)에 신사참배를 하였던 사실로 인해 모든 공직을 사임하였고, 성경강해 노트에 ‘참회의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국성결교회의 종말론적 정체성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종말론에 영향을 주었던 전형적인 세대주의자 블랙스톤과 조지 왓슨의 종말론에 기초한 것이었다. 성서예언의 문자적 미래적 성취를 기대하며,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분은 천황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고,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공중재림은 환란 전 성도들을 공중으로 구원하시며 지상재림으로 악한 세상권력을 심판하시고, 성도들과 함께 지상에서 천년왕국을 건설하여 통치하시고, 마지막 날에는 신천신지를 세우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결교회 신자들은 일본의 천황도 사람에 불과하며 일제는 반드시 패망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한국성결교회의 재림신앙은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성서에 기초한 종말론적 전망을 제시해 주었고, 정치적 탄압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해방의 때를 기다리는 신앙의 인내를 이루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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