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 철원 천안 영덕 밀양 부산 등
전국 곳곳서 폭넓게 만세운동 동참
신사참배 거부 등 일제 통치에 항거

3.1운동은 일본제국주의에 무기력하게 짓눌려온 굴욕적인 삶에 대한 공동체적인 저항이자 평화와 공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런 저항 속에서 전국적으로 긴밀한 연결망을 가진 기독교는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되는 구심점이 되었고 성결교회의 참여는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성결교회는 다른 교단과 단체에 비해 수적으로는 3.1운동에 상대적으로 적게 참여한 것은 사실이다. 1907년 교단이 생긴 후 12년 밖에 지나지 않아 아직 교단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작은 전도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원은 적었을지 몰라도 풀뿌리운동처럼 성결교인들은 지역 곳곳에서 3.1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에 저항하는 등 행동하는 신앙의 양심을 보여줬다. 아직 교단의 모습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작은 전도관이었지만 나라를 사랑하고 자주독립을 열망하는 마음과 행동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특히 성결교회의 3.1운동 참여는 전국에서 일어났다. 서울에서 경성신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이 3.1운동에 동참한 것을 비롯해 철원, 경남 밀양, 경북 영덕, 부산, 천안, 경북 현풍, 평남 대동 등 전국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대규모 만세운동을 이끌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고향과 사역지 곳곳에서 3.1운동에 앞장섰다.

박창훈 박사(서울성대 교회사)는 이런 특징에 대해 “개인의 고향이 다양했다는 점과 아마도 선교지분할정책에서 성결교회가 제외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짐작된다”면서 “성결교인의 3.1운동 참여는 없었거나 적었던 것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부연했다.

또 성결교인들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목회자들과 교회를 활용해 독립만세운동의 계획과 정보를 공유했으며,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할 수 있었다. 교회는 서울에서 보내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비롯한 자료를 받고 상황을 전해 듣는 장소로서 모임을 열고 만세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감당했다.

이 외에도 선교회, 학교동문, 동향(향우회), 여성단체, 정치단체 등 다양한 관계망은 개인들의 정치사회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었던 매개체였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민족의식은 구체적으로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며 참여하는 행동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3.1운동 이후에도 성결교회는 불의한 일제의 통치에 저항했다. 가장 대표적인 일이 1924년 1월 11일 충남 강경교회에서 김복희 교사와 교회학교 어린이 57명이 신사참배를 거부한 일이다. 이 사건은 국내 최초로 일어난 신사참배거부운동으로 일제를 향한 ‘비폭력 저항’임과 동시에 자신들의 안녕과 미래를 포기할 수도 있었던 최후의 저항이었다.

또 일제말에는 교단 폐쇄의 위기 속에서도 비밀리에 가정예배와 기도회를 드리며 신앙을 이어갔다. 특히 성결교회는 신앙고백과 믿음에 반하는 조치들, 특히 구약성서 폐기와 재림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박창훈 박사는 “일제강점기 당시 성결교회는 다른 교단에 비해 두드러진 활동은 없지만 풀뿌리 운동처럼 지역 곳곳에서 3.1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에 항거했다”며 “이는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드러냄과 동시에 성결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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