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습 달라도 예수 부활은 변함없는 사실”

부활절은 기독교의 최대 축제이다. 그런데 부활절이 되면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부활절 날짜는 왜 해마다 바뀌는 것이고,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부활절 날짜가 왜 다른 것인가? 부활절 날짜와 유래, 또 부활절을 어떻게 지켜왔는지 교회사적으로 살펴본다.
 

부활절 명칭은 어디서 기원했는가?
영어로 부활절을 ‘이스터’(Eater)라고 하고, 독일어로는 ‘오스텐’(Ostern)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단어가 튜턴족의 아침(혹은 봄의) 여신인 ‘에오스터’(Eostre)와 관련된 것으로 주장하면서 부활절 명칭의 기원으로 주장하는 글들이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영국 교회역사가이자 수도사인 베다 베네라빌리스(Beda Venerabilis, 673-737)가 쓴 ‘시간계산에 대해’(De temporum ratione)라는 책의 언급을 거론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학자들에게 논란의 여지도 많고, 반박의 여지가 크다.  

베다 수도사보다 600년 이전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유월절과 연관해서 이해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이전에는 유대교의 전통과 관습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유월절(Passah) 전통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유월절 어린양을 십자가에 달려 희생당하신 예수님과 연관 짓고, 유월절에 먹은 누룩 없는 빵을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나누었던 성찬의 빵과 연관지었다. 

위의 설명을 요약 정리하면 이렇다. 오늘날 부활절에 대한 명칭을 영어와 독일어의 어원으로 보면서 이방여신과 연관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보다 초대교회부터 이어진 유월절 전통 가운데 부활절을 이해하는 명칭이 오늘날에도 남아 있기 때문에 부활절 명칭이 이방여신의 이름에서 기원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부활절 날짜는 왜 다른가?
간단히 말하면, 달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방교회에서는 교회의 절기를 지킬 때, 오늘날의 달력인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하지만, 동방교회는 율리우스력으로 계산하고 있다.

교회역사상 부활절 날짜에 대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간의 불일치는 초기부터 있었다. 지금의 터키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은 부활절을 유대력의 니산월 14일로 정하고 기념했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절을 주의 날인 일요일로 정했기 때문에 각 해마다 니산월 14일이 주일이 아닐 경우 14일에서 가장 가까운 주일에 부활절을 기념했다. 동서방교회의 이러한 차이는 155년 로마교회 감독 아니케투스와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캅 사이에도 나타나지만, 당시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각자의 전통을 인정했다.

그러나 197년경 로마교회 빅토르 감독이 부활절을 일요일로 정하는 교령을 발표하는 등 부활절 날짜를 통일해보려고 했지만, 동방교회의 반대와 교회 지도자들의 만류로 통합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 때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부활절 날짜를 유대인의 역법을 버리고 춘분이 지난 보름달 이후의 첫 일요일로 정하게 하였다. 그런데 또 하나의 변수가 생기게 되었다.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기존의 율리우스력이 아닌 새로운 역법을 만들고 부활절을 계산해서 기념한 것이다.

개신교는 1700년에 이르러서야 그레고리력을 따라서 부활절을 지켰고, 동방교회는 아직도 율리우스력에 따라 부활절을 기념하고 있으니, 지금도 부활절 날짜가 서로 달라 다른 날에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언제쯤 통일될 수 있을까요?
  
교회는 부활절을 어떻게 지켜왔는가?
초대교회의 부활절은 철야축제였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뀌는 밤이었다.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예식적으로 현재화시키려고 했다. 이들은 종말을 인식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슬픔의 기간과 기쁨의 기간으로 구분했다. 그래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초대교회의 이러한 종말론적인 부활절 인식은 다소 약해지게 되었고, 이때 부활절에 대한 새로운 강조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빛의 축제와 입교식이 부활절과 연결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부활의 빛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세례예식과 잘 어울리는 것이었고, 교회는 영적인 새로운 탄생을 부활절의 축제에 포함시켜, 이 영적 새생명을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만찬까지 연결시켰다. 특히 4세기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감독은 부활절 예배를 세례식과 세족식과 성찬식을 연결해서 예배를 더욱 확대시켰다. 암브로시우스 감독은 부활절 다음에 이어지는 주간에도 영적 새생명들에게 매일 말씀을 전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윤리와 기독교 진리를 다시 한 번 교육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늘날 부활절의 상징이 된 부활절 달걀은 중세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초대교회 때 부활절에 달걀을 먹었다’는 언급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떡을 떼면서(행2:42, 성만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감사했다. 부활절 달걀은 부활절보다는 사순절과 연관되어 7세기 혹은 8세기에 나타났다. 즉, 사순절기간 육류로 취급되어 달걀을 먹을 수 없었다는 언급이다. 당연히 사순절 기간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달걀을 마음 편히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1300년이 지난 현재의 부활절 달걀은 다양하고 기발한 모양들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부활절 달걀로 구운 달걀이 유행하고 있다. 역사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달걀이 부활절 상징물이 된 것은 달걀껍질을 깨고 나오는 새 생명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연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상 부활절을 기념하는 문화와 예식과 관습은 변해 왔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변함없는 사실임을 지구상의 모든 교회들이 오늘날에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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