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선교회 소속 선교사들도 적극 나서

▲ 카우만이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
 1919년 3.1운동 당시 조선에 머물고 있었던 외국인 선교사는 장로회 소속 182명, 미감리회 50명, 남감리회 33명이었으며 성결교와 관련된 동양선교회 소속 선교사는 9명이었다.

일제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주동자들을 체포하는 동시에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을 선동자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과 간담회 형식으로 비밀리에 접촉했는데 3.1운동 확산을 막기 위해 조선인들을 설득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제의 기대와는 다르게 선교사들은 막후에 열린 간담회에서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조선총독부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3.1운동을 민족 혁명으로 인식하고 해외에 3.1운동이 일어난 이유를 적극 알리는 일도 선교사들의 몫이었다. 특히 동양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미국에 보낸 편지는 3.1운동과 조선사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알리는데 큰 일을 감당한다.

대표적으로 당시 동양선교회 대표 카우만 선교사가 일본과 한국에서 보내온 편지 다섯 통을 묶어 1919년 4월 28일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로버트 랜싱에게 전달한 것이다. 여기에는 3.1운동이 왜 일어나게 되었고, 일제의 잔혹한 만행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가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특히 카우만 선교사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경우 한국과 일본에서의 사역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었지만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미국 정부에 전하며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했다.

카우만 선교사가 보낸 편지에는 일제에게 폭행을 당했던 존 토마스 선교사가 맨스필드 박사를 통해 보낸 내용도 담겨 있다. 편지에 따르면 맨스필드는 서울 방문시 토마스 선교사를 만나 3.1운동 실상을 미국에 전달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토마스 선교사는 이 편지에서 “한국의 독립선언문이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같은 정신을 표현하고 있으며 대한제국 이후 시민이 권력의 중심이 된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성서학교가 정치적인 사건으로 문을 닫게 되었고, 학생들이 체포된 사실을 보고했다. 

이런 소식들이 해외에 들려오면서 조선에 대한 외국의 인식도 높아졌다. 변방의 작은 나라인 조선에서 ‘비폭력 혁명’이 일어나고 그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던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선교사들의 이런 노력으로 해외 신문에도 조선에서의 소식이 잘 알려지게 되었다.

황훈식 박사(서울신대 강사)는 “당시 선교사들은 겉으로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적극적으로 돕고 뒤에서 알리는 역할을 감당했다”며 “정교분리에 대한 새로운 판단과 해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