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의 벽에서 ‘회복’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다

이스라엘 성서현장 10-통곡의 벽

성서의 땅의 '회복'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다

통곡의 벽(Wailing Wall)은 유대인에게 가장 성스러운 장소의 하나다. 옛 이스라엘 성전 벽의 서쪽 벽의 일부인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성전의 상실을 슬퍼하고 재건을 기대하며 토라를 암송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통곡의 벽은 헤롯이 BC 20년에 솔로몬의 성전에 이어 거대한 성전을 지을 때 건축된 건축물의 일부다. 서기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면서 ‘주춧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도록’ 무너뜨렸다. 하지만 서쪽 벽 일부가 남았는데 일부에서는 티투스가 성전을 부수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역사적 고증은 불확실하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을 죽였는데 성벽은 이 같은 비극을 지켜보았을 것이며 예루살렘성을 바라보며 우셨던 예수님처럼 눈물을 삼켰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 성벽이 밤이 되면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는 말까지 할 정도다.

 

무너진 성벽 위에 다시 성벽을 쌓는 건축 방식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 벽 일부는 옛 흔적이 남아 있다. 벽을 꼼꼼히 살펴보면 밑 부분부터 위로 갈수록 돌의 크기가 차이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돌을 쌓은 시대 차이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전문가에 따르면 맨 밑에서 7단까지는 제2성전 시대의 것이고 그 위의 4단까지는 로마 시대 덧붙인 것이며, 그 위는 터키 시대의 돌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설과 함께 예루살렘 멸망에서 한동안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이후 비잔틴 시대 1년에 한번 성전이 파괴된 날에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었고 그 때마다 유대인들은 이곳에 모여 성전을 두들기며 통곡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이브월(유대력 5월) 9일을 성벽이 파괴된 날로 지켰고 이러한 전통이 오늘에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통곡의 벽은 유대인의 성지인 만큼 출입 통제가 엄격했다. 꼼꼼히 가방을 점검했고 전자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서구인과 아시아계 동양인에게는 엄격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소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통곡의 벽 검색대를 나서자 넓은 광장에 휘날리는 이스라엘 국기와 이스라엘 군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스라엘 국기는 이곳이 이스라엘의 영토요 신성한 곳임을 상징하는 듯했다. 광장 한 곁에는 신병훈련소에서 훈련 마치고 자대배치를 앞둔 병사들이 보고 겸 해단식을 막 마쳤다. 그들은 그동안의 고된 훈련기간을 생각하는 듯 즐거운 표정으로 서로 어울리고 기념촬영을 하면서 하루를 즐기고 있었다. 일부 병사들은 통곡의 벽을 향해 기도를 하러 나서기도 했다.

통곡의 벽은 남성과 여성의 출입문이 다르다. 중동 문화의 반영이라 생각하며 남여평등이라는 기준에서 바뀌어야 할 악습이라 생각해 본다. 하지만 한편으론 ‘남성과 여성 모두 편하게 기도할 수 있는 시간도 되겠다’라며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유대인들은 ‘키파’를 눌러쓰고 ‘테필라’라는 끈을 손에다 칭칭 감고 통곡의 벽을 향해 나아간다. 그들을 뒤따라 종이로 만든 키파를 쓰고 통곡의 벽을 향했다.

통곡의 벽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머리를 흔들며 기도하고 있었다. 중간 중간 전통 유대인복장을 한 사람들도 섞여 있고 토라를 읽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통곡의 벽에 오면 순례자들은 가슴 속에 담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다. 또한 소원을 적은 종이를 벽 틈에 끼워 넣으면 소운 성취가 된다는 소문도 있다. 성벽 돌 틈 사이에는 빽빽이 종이가 꽂혀 있다. 기도제목을 적은 ‘크비틀’은 더 이상 들어갈 공간이 없을 정도다. 기복적인 신앙임은 분명하지만 인간의 기원, 하나님을 향한 마음, 정성이라고 본다면 큰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 통곡의벽-안쪽

남성들이 들어서는 통곡의 벽 왼쪽 편 안쪽 ‘윌슨 아치’ 아래쪽으로 들어서니 정통파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을 향해 기도하고 있었다. 이곳의 지하에 묻힌 17단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그 묻혀 있는 일부가 옛날 성벽의 일부라고 한다. 기도방도 마련되어 있고 기도탁자도 마련되어 있다. 토라를 읽고 외우는 정통파 유대인들 모습을 보면서 종교적 열심에서 가장 앞서 있다는 한국인의 열심을 만나게 된다. 그들 유대인의 모습에서 새벽 교회에 나와 눈물로 기도하는 우리네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움찔해 진다. 감동이 몰려 온다. 하지만 안타까움도 몰려 왔다.

토라를 머리를 끄덕이며 읽는 모습과 벽 안에 꾸역꾸역 집어넣은 기도문이나 소원문 등을 보면서 형식화한 신앙, 기복신앙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삶’과 ‘행함’의 열매로 결실 맺지 못하는 형식화된 종교는 다시는 열매 맺지 못하도록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도 통곡의 벽을 찾아 하나님을 향해 기도한 후 발걸음을 돌린다. 그 통곡의 벽을 부여잡고 조용히 이 땅의 평화를 위해, 내 조국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마음을 모은다. 주 예수여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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